1999.09.19 창간 서울칼럼니스트모임 (Seoul Columnists Society) 발행
2002년 1월 22 칼럼니스트 COLUMNIST No.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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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마음, 따뜻한 세상

필자는 최근 가수 양희은씨의 데뷔 30주년 기념 앨범 '양희은·30'에 담긴 사연과 노래를 들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노래속 주인공의 애절한 사연이 눈물겹고 양희은씨의 고운 마음이 삭막한 세상을 '아침이슬'처럼 영롱하게 수놓고 있다.

1971년 '아침이슬'로 데뷔한 양씨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늙은 군인의 노래' '한계령' 등 서정적이면서도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을 담은 포크송을 통해 70년대 이후 청년문화를 주도했다. 30년 동안 호소력 짙은 맑은 음색으로 그녀가 부른 아름답고도 힘있는 노래들은 우리 삶의 고단함을 평화롭게 위무해 주었다.

그런 그녀의 30년 노래 인생사에 그냥 지나쳐 버리기엔 너무나도 가슴을 저리게 하는 사건이 있었다. 지난해 4월, 양씨가 진행하는 라디오 '여성시대'에 편지가 날아왔다. 편지를 보낸이는 추희숙씨. 나이 40세. 말기암 환자. 3년간 병상에 있는 엄마가 아들의 여섯 살 생일에 항암제와 진통제를 먹으면서 사흘에 걸쳐 편지 한 통을 완성했다.

'희제야. 엄만 네가 유치원가는 것도 보고싶고, 여자 친구 땜에 가슴 태우며 밤새우는 것도 보고싶고, 네 결혼식장에 촛불도 댕겨주고 싶고….그렇지만 엄마가 네 곁에 없더라도 너무 슬퍼 말고 엄마 생각은 조금하고 늘 맑은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돌보렴.'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동생 공부시키느라 서른 중반에 결혼했다. 난산과 노산 끝에 낳은 아이가 커갈 무렵 닥친 병마. 한 여자이자 아내이자 어머니의 다른 이름인 희제 엄마는 지난 8월 끝내 하늘 나라로 갔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아들에게 맑은 마음으로 봉사하는 삶을 당부하는 마음이 아름답다.

편지는 양희은씨를 울렸다. 그녀 역시 열아홉부터 생계를 책임진 어린 가장이었고 말기암환자로 시한부 선고를 받았었다. 그래서 희제 엄마에게서 삶의 고단함, 현실의 척박함, 환자만이 느끼는 간절함에 공감을 했다. 또한 "희제 엄마 힘내세요"란 특집방송을 했을 때 보내준 많은 아줌마들의 사랑과 격려에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데뷔 30주년 기념앨범을 만들면서 주변에선 그럴듯한 음반을 만들고 콘서트라도 열라고 권했지만 그녀의 뜻은 달랐다. 거친 세상살이에도 맑은 눈빛과 따뜻한 웃음을 잃지 않는 사람들, 나눔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들, 서로 돌보아줄 줄 아는 사람들, 고단하고 지친 어깨로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여자들에게 바치는 노래를 만들었다. 그냥, '나도 그거 알아' 하며 내려 앉는 손, 그런 손의 무게만큼의 든든한 노래이고 싶다고 밝혔다.

음반 첫 머리에 추희숙씨의 '희제 생일축하 편지'가 낭송되고 추씨의 '송곡'이 마지막을 장식한다. '무거워서 못 가겠어요/그대들/보내주신/사랑이 너무 커/무거워서 다 지고/못가 겠어요'로 시작되는 시도 눈시울을 적신다. 특집방송 이후 보내준 아름다운 마음들에게 일일이 답장을 쓰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시로서 답변하고 있다.

눈물마저 메마른 삭막한 세상에 눈물은 카타르시스 구실을 한다. 그 눈물은 팍팍해진 삶을 정화(淨化)하는 청량제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따뜻한 손길로 이 세상을 따뜻하게 어루만진다.

경제 한파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구세군의 자선냄비 모금액이 1928년 모금을 시작한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온정은 어려운 가운데서 샘솟는다. 해마다 100만원자리 현금을 구세군 냄비에 넣는 사람이나, 연말이면 어김없이 달동네에 쌀 600포대씩을 배달하는 사람 또한 얼굴 없는 천사들이다. 그들은 부패한 이 사회의 소금과 촛불이다.

정·관계 뿐 아니라 언론인까지 각종 게이트에 연루되어 돈의 악취를 풍기는 세태에 따뜻한 마음을 지닌 따뜻한 사람들이 있어 그래도 살맛 난다. - 2002.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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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섭
시인,칼럼니스트
일요서울신문 편집인 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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