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09.19 창간 서울칼럼니스트모임 (Seoul Columnists Society) 발행
2001년 12월 7일 칼럼니스트 COLUMNIST No.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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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즐거움

"남들과 국내는 물론 외국여행도 여러 번 다녔는데 왜 이번 나들이가 이렇게 흐뭇하고 편안한가. 여러 가지 여건을 감안하면 오히려 불편한 점이 많았는데... " 나이 들어 좀 배워 보자고 다니는 한문서당에서 실시한 전통문화 답사 1박2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지난 봄 어느 날 버스에서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었다.

개설된 강좌가 '논어' '맹자' '장자' '한시' '한자 구조학' 등 다양해 수강생들끼리 전혀 모르거나 알아도 겨우 눈 마주치면 인사나 하는 정도가 고작이어서 사실상 모르는 사람들 틈에 끼어 가는 여행이었다. 물론 서당을 오래 다녀 자연히 가까워졌거나 본래부터 아는 이들끼리 두세 명씩 붙어 다니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모두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하루 밤을 같이 자고 났어도 별로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서로가 대부분 낯선 사이였다. 이 점만으로도 이 나들이는 탐탁찮은데 40여명이 남자 두 방, 여자 한 방으로 나뉘어 잤으니 예민한 사람들은 끔찍하다고 비명을 지르기에 충분했다. 유달리 교양이 있거나 고매한 품위를 지닌 사람들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의 동행이었다.

그럼에도 어느 나들이보다 마음 편하고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한참 생각해보니 답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서로가 잘 모른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 핵심이었다.

한문 수강생들은 대학원 및 학부생 그리고 현직 교수, 교사 등이 꽤 되지만 큰 비중은 장년이상의 퇴직자들이나 주부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는 서당 측이 제공하는 자료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인생의 본무대에서 맡은 배역을 다하고 이제는 막이 바뀌어 긴장과 속도에 그리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주변의 역을 하는 이들이다. 인생의 한 가운데에서 겪어야 했던 치열함과 긴장, 경쟁과 야망, 숱한 갈등과 좌절에서 이제는 퍽 자유로워진 것이다.

그들은 그래서 그 해방감을 매우 소중히 여긴다. 어쩌다 같이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게 되어도 대개 지난날을 서로 묻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 자칫하면 오랜만에 얻은 해방감과 자유를 손상시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끼리 여행을 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누구인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가슴에 붙은 이름표와 말씨 정도다. 얼굴 표정과 행동거지도 그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중요한 자료이지만 이해관계로 점철된 젊은 날의 현직생활도 아닌데 굳이 거기에 크게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그래서 상대가 어느 지역 출신인지 학벌이 어느 정도고 무슨 학교를 나왔는지 모른다. 그의 재산상태가 어느 정도고 지금 무엇을 하는지 모르며 과거에 종사했던 직업 같은 것은 더더욱 모른다. 현재 같은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며 이렇게 기회가 나면 함께 여행을 가는 즐거움만을 나눌 뿐이다.

한 마디로 우리 사회의 고질인 지연, 혈연, 학연 같은 것들이 자리할 틈이 없다. 이런 장애물들이 없으니 현 상태에서 보고 느낀 대로 상대에 대한 어떤 생각을 갖거나 판단하고 결정한다. 편견에 따른 오해, 고향 학교가 같고 혈연이라는 이유만으로 패거리를 짓는 졸렬함이 발붙일 여지나 이유가 없는 것이다.

조그만 모임의 짧은 일정이지만 이처럼 우리를 얽매고 가두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을 맛보았으니 기분이 그렇게 흐뭇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 사회의 고질적 병폐가 이처럼 많이 제거된 저공해 기회는 그렇게 많지 않다. 그 여행은 마치 순도 높은 생수를 마시고 난 뒤처럼 정신을 맑고 개운하게 해 주었다. 현재 우리 사회가 갖가지 파벌로 얼마나 지독하게 오염되어 있는가를 반증해주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 사람들이라고 특히 남다른 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문자 그대로 보통 사람들일 뿐이다. 역시 자주 만나고 부딪치다 보니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서로에 대한 것들을 우연히 알게 되고 그것이 인간관계에서 여러 모로 작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남을 피곤하게 하거나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지만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고 어떤 테두리 속으로 한정되어 가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것이 나쁜 건 아니지만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고 스스로를 지난날처럼 또 다시 얽어매고 가둔다는 점에서 가끔 아쉬운 생각이 드는 때가 없지 않다. 무엇이든지 많이 알아야 하고 그것도 남보다 빨리 터득해야 하는 무한경쟁과 숨가쁜 정보화 세상이다. 따라서 아는 것이 최선이고 모르는 것은 낙후라는 맹목적 신념에 우리는 사로 잡혀 있다. 그러나 이처럼 모르는 것이 즐겁고 앎이 두려운 것도 우리 생활 속에 없지 않다. 이를 잘 분별하고 추려내서 참 맛을 즐기면 삶의 질은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삼성SDI'사보 2001.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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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호
칼럼니스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http://columnist.org 서울칼럼니스트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