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폭 닮은 패거리문화
조직폭력배를 줄인 '조폭'이란 말이 보통명사가 될 정도로 회자되면서 '조폭 신드롬'
이 확산되고 있다. 어느 사회나 범죄자 집단은 존재한다. 미국의 갱스터는 노예, 죄수,
막벌이꾼을 지칭하던 불량배들이었다. 뉴욕·시카고 등 대도시의 암흑가를 누비며
은행강도, 매춘업, 마약밀매 등을 일삼았으며 요즘은 기업적인 조직형태로 활동범위가
확대됐다.
일본 야쿠자의 어원은 8(야)·9(쿠)·3(자)으로 화투판의 끗수 '망통'처럼 쓸모가 없다는
의미로 노름꾼에서 나왔다. 일정한 직업 없이 폭력을 일삼으며 남을 등치다가
요식업소, 유흥업소 등을 보호해 준다는 명목으로 돈을 상납 받기도 하고 업소의 경영에
직접 참여하는 등 그 영역을 차츰 넓혀왔다. 그렇게 모은 막대한 재산과 폭력을 배경으로
마약이나 고리대금업 등 불법 또는 합법을 가장한 사업을 통해 요즘은 해외로 활동범위를
넓히고 있다는 것이다.
건달, 깡패로 불리던 한국의 조폭도 일본의 야쿠자 조직을 본뜬 것이 많다. 과거 조폭들은
유흥가를 무대로 음성적으로 기생해 왔으나 요즘은 골프장과 건설업, 카지노와
콘도, 게임산업에 뛰어들어 스스로 업체를 운영하거나 합법을 가장하고 있다. 조폭이
변호사와 전문경영인까지 고용해 기업인수와 벤처투자까지 하는 합법적인 기업가로 바뀌고
있다는 경찰의 분석도 이를 뒷받침한다.
미국의 갱스터나 일본의 야쿠자, 한국의 조폭 공통분모는 보스에 대한 충성, 의리와
우정, 명예를 중시하면서 규율이 엄격하다는 것이다. 조폭세계에서 조직이나 보스를
배신하면 가혹한 처벌을 받게된다. 1920년대 미국 갱들의 평균 수명이 29세에 지나지
않았던 것도 비명횡사가 얼마나 심했는가를 입증해준다. 야쿠자들도 의리를 저버리고
의무를 소홀히 하면 손가락을 하나씩 자르는 등 가혹한 제재가 따랐다. 영화 '친구'는
배신자의 말로를 잔혹하게 묘사했다.
의리와 의무로 똘똘 뭉친 조폭세계처럼 패거리 문화가 잘 형성된 곳도 드물다. 폭력
조직원들은 대부분 지연에 학연이 얽혀 있어 조직의 결속력이 끈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근 일고 있는 조폭 신드롬은 영화 '친구'를 기폭제로 '조폭 마누라'나 TV드라마 등
대중문화의 영향이 크다. 고교생이 수업중인 교실에서 교사와 학생이 보는 가운데
급우를 살해한 사건은 우리사회의 조폭 신드롬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급우를 살해한
학생은 영화 '친구'를 40회나 보았고 폭력배들이 쓰는 대사를 줄줄 외울 정도였다니 할
말을 잃게된다. 폭력을 미화하는 대중문화가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들에게 얼마나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사이버 공간에도 조폭이 판치기는 마찬가지다. '조폭' '깡패'란 이름으로 결성된 동호회가
200∼300여개에 이른다. 사이트를 열면 '조폭이 되려면'이라는 안내문까지 등장해
섬뜩하다. '조폭건달'이라는 동호회에는 300명이 넘는 중고생이 등록해 경찰이 수사에
나설 정도로 심각하다. 10대들 사이에는 폭력배의 말투나 행동을 흉내내는 것이 유행이
돼버렸다.
그러나 조폭과 같은 패거리문화는 우리사회 구성원들의 빗나간 의식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한 언론기관의 여론조사에서도 드러났듯이 '인맥을 잡아야 출세한다'는 응답자가
48%로 능력이 우선이라는 52%와 팽팽히 맞서 능력만큼이나 지연·학연 등 인맥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패거리를 형성하는 집단으로는 역시 지연이 으뜸이고 학연, 혈연,
이익단체가 그 뒤를 잇고 있는 것도 조폭세계의 지역패권주의와 비슷하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G&G그룹회장 '이용호 게이트'에서도 조폭 출신의 사업가가
등장한다. 지난해 터진 '정현준 게이트'에서도 기업가로 변신한 조폭출신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웬만한 대형 경제사건에는 어김없이 조폭의 이름이 들어 있으며 권력과의
유착의혹이 불거지고 있다. '제2의 수서비리'로 일컬어지는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일대
토지 용도변경·매각과정에서 드러난 특혜 의혹에도 비호세력으로 빠짐없이 정치권 실세와
검찰과 조폭이 감초처럼 등장한다. 각종 '게이트'에서 보듯이 조폭적인 운영원리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사회전반을 지배하는 것도 큰 문제다. 사회지도층과 조폭이
공생, 범죄와 비범죄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우리사회의 치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검찰과 경찰이 '조폭과의 전쟁'까지 선언하고 소탕작전을 벌이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조폭이 발붙일 수 없도록 사회가 투명해져야 한다. 사회지도층 조차 조폭과 연결되어
패거리를 형성하는 사회분위기부터 바꿔야 한다.
- 담배인삼신문 2001.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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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섭
시인
일요서울신문 편집인 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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