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이제 더 이상 보호받지 못하는 세상이 된 것 같다. 도대체 도청·감청이 얼마나 심하기에 「도청공화국」「감청천국」이라는 말까지 생겼는지 모르겠다. 전제주의국가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버젓이 자행되고 있으니 분노감이 지나쳐 서글픔마저 느끼게 된다.
정보화사회에서는 무엇보다도 통신이 가장 중요한 생활수단인 터에 남이 들을까봐 두려워 통신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니…. 이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일이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을 쥐가 듣는다」는 속담이 있긴 하지만, 남들과 전화 한통 마음놓고 못하는 세상이라면 그 사회는 그야말로 죽은 사회이다.
최근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서 펴낸 「도청·감청 및 비밀녹음의 제한과 증거사용」이라는 연구보고서는 우리사회에서의 도청 및 감청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에 있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현행 통신비밀보호법이 규정한 감청대상 범죄가 1백50여가지나 돼 웬만한 범죄수사에 감청이 가능하고, 감청허용기간도 3개월(일반범죄)에서 6개월(국가안보 사안) 로 길어 인권침해 소지가 크다는 것이다. 특히 감청허용기간은 일본 10일, 미국 30일 등 선진국에 비해 너무 긴데다 연장마저 가능해 사실상 무한정 감청할 수 있는 길이 트여있다는 지적이다.
보고서는 감청남용으로 인한 국민의 기본권 침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감청이 가능한 범죄를 마약·유괴·조직범죄와 같은 중범죄나 안보관련범죄 등으로 제한하고 감청기간의 축소, 긴급감청 사후 허가제 도입, 피감청자에게 감청사실 사후통보 등을 관련법에 포함시킬 것을 제시하고 있다.
보고서를 작성한 인하대 법대 원혜욱교수는 는 국가안보와 관련한 감청의 경우 통신비밀보호법 7조에 「국가안전보장에 대한 위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이에 관한 정보수집이 특히 필요한 때에는 통신제한조치를 할 수 있다」고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있다며, 이보다는 국가안보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범죄를 명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감청·도청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해마다 국회에서는 이 문제를 거론하면서 시정을 촉구하고 있지만 관련기관은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답변만 되풀이할 뿐 시간만 지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무소식이다. 그 정도는 또 괜찮다. 국회의원들이 국회에서 신랄하게 성토하고, 이를 언론에서 적극적으로 보도하고, 관계당국자도 시정하겠다고 약속했으면 어느 정도까지는 개선의 기미가 보여야 한다. 하지만 감청건수는 오히려 늘어나고 있으니 이는 수사기관이 국회와 언론과 국민을 얕잡보고 있거나, 아니면 「주제파악」을 하진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수사기관의 감청이 늘고 있음은 정보통신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올 1월부터 6월까지 국가정보원과 검찰이 실시한 감청 건수는 각각 6백63건과 1백65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75.9%, 22.2% 늘어났다. 법관이 발부한 영장 없이 수사기관의 문서요구로 통신회사가 제공한 통화자의 인적사항과 통화시간, 전화번호 등 통신자료도 국정원 7천15건, 검찰 1만8천1백54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각각 102.0%, 18.2% 증가했다. 휴대전화 통신자료 제공도 지난해보다 80.9%, e메일 등 PC통신에 대한 자료제공은 무려 280.4%나 늘어났다.
수사기관의 마구잡이 감청이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증가하고 있는 것은 애매하게 규정하고 있는 현행법에서 1차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원혜욱교수의 지적대로 현행법은 감청허가대상 범죄를 너무 광범위하게 인정함으로써 수사기관이 필요하다면 별다른 제약을 받지 않고 감청을 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그래서 적당한 구실만 있으면 얼마든지 정치사찰을 위한 감청도 가능한 실정읻. 결국은 현행 통신비밀보호법은 국민의 인권보다는 수사편의에 우선순위를 두었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통신을 자유로이 하는 권리는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국민의 기본권이다. 우리나라 헌법 제17조(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와 제18조(모든 국민은 통신의 비밀을 침해받지 아니한다)에 이 권리를 명시해놓고 있다. 이는 국가에서도 국민의 「통신권」을 보호해줘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점에서 마음은 답답해진다.
도청이나 감청에 대한 공포는 여야 가릴 것 없이 정치권에서 더욱 심각하다. 도청공포증후군이라고 해야 할 정도이다. 한나라당 이회창총재는 휴대전화를 발신전용을 합쳐서 3대씩 갖고 다닌다. 수행비서용 1대, 발신전용 1대, 공개된 것 1대 등이다. 발신전용 휴대폰의 전화의 번호는 수시로 바꾸고 있다고 한다.
이밖에 김기배사무총장은 차량전화까지 포함해서 5대를 쓰고 있으며, 정형근의원은 이미 오래 전부터 다른 사람 명의의 휴대전화 4∼5대를 번갈아가며 쓰고 있다. 이재오 원내총무는 일과 후에는 휴대전화를 아예 갖고 다니지 않고 외부에 연락을 할 때는 사무실이나 집으로 전화를 걸어 물어본 뒤 공중전화를 이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상당수 여당 관계자들도 휴대전화를 「공개용」과 「비공개용」으로 구분해 사용하고 있다. 비공개용의 경우 아주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긴급한 전화를 받는 수신용과 평상시에는 사용하지 않다가 극도의 보안이 요구되는 전화를 걸 때 사용하는 발신용이 있다. 비공개용은 가족이나 친·인척, 보좌진과 전혀 관계 없는 사람의 명의를 사용하는 것은 상식으로 돼 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13개의 휴대전화를 갖고 각각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업들도 「도청 노이로제」에 걸려 있다. 여러 회사들이 사원들에게 주요한 사안과 관련된 대화일 경우 회사전화보다는 휴대전화를 이용하고 휴대전화도 가급적 자기 것보다 제3자의 것을 사용할 것을 권하고 있다. e메일이나 인터넷 접속을 통한 교신은 받아보는 즉시 삭제해버릴 것 등을 권장하고 있는 것은 물론 회의실 등에는 도청방지 장치까지 설치해 놓은 회사가 많다.
모든 것이 통신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정보화사회에서 통신의 비밀을 보장받는 일은 의식주생활을 자유로이 영위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기본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본권을 보호받기 위해서는 국민 스스로가 노력하기에 앞서 법적·제도적 뒷받침이 선행되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통신 및 대화의 비밀과 자유에 대한 제한은 그 대상을 한정하고 엄격한 법적 절차를 거치도록 함으로써 통신비밀을 보호하고 통신의 자유를 신장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통신비밀보호법의 입법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감청대상 범죄 및 감청기간의 축소, 감청사실 사후통보 등 형사정책연구원이 제시한 방안이 어서 빨리 현행 통신비밀보호법에 반영되기를 기대해본다.
-----
이재일
칼럼니스트
월간 인터넷라이프 편집인.편집국장
2001.10.19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