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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
선비라면 시서화(詩書畵)에 능했다. 선비는 사농공상(士農工商)에서 맨 위층이다. 양반과 중인과 상인과 천민의 구별이 사라지고 만민이 평등한 오늘날 사농공상의 순위를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학식이 높고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있다. 선비는 오늘날의 세상에서는 어떤 사람들하고 같거나 비슷할까. 예전에 선비는 대체로 학식과 권세와 부귀를 함께 지닐 수 있었다. 오늘날은 그러하지 않다. 학식이 권세와 부귀를 보장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제 선비 자리를 낮추고 넓힐 수밖에 없다. 오늘날 선비는 '교양인'이란 말로 대치할 수 있을 것이다. 선비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품격을 말할 때 문자향(文字香) 또는 서권기(書卷氣)라는 말을 쓴다. 문인화(文人畵)는 본 대로 그리는 그림이 아니다. 그 그림에서 묘사는 정확하지도 않고 정세하지도 않다. 눈을 끄는 현란함도 없다. 그저 먹 색깔의 짙고 옅음만이 있다. 기교를 부리면 기품이 떨어진다. 강렬하거나 자극적이지 않아야 하고 은은해야 한다. 대상물체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그린다는 것은 서양화의 전통에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선비가 그린 그림의 기품을 이르는 말에 '문자'와 '책'이 들어간다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문자 속이 훤하고 읽은 책이 많다는 것이 선비에게 중요하며 그것이 그림에도 나타나게 마련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듯하다. 세상이 복잡하게 되어서인지 책 읽기는 예전보다 덜 강조되고 있다. 옛 선비들에게 책 읽기는 오늘날 말로 말하면 스트레스를 심하게 줄 정도였지 않나 싶다. 한우충동(汗牛充棟: 수레에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리고 집안에 쌓으면 꽉 찰 만큼 책이 많음)이나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 : 사나이는 모름지기 다섯 수레에 실을 만큼의 책을 읽어야 함) 같은 말로 책을 많이 읽을 것을 권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임금이 신하에게 책을 읽으라고 휴가를 준 일도 있다. 이제는 옛날처럼 책 권하는 사회가 아니다. 학식의 많음을 존경하는 마음도 지금이 옛적만 못하다. 책을 존중하는 마음도 그러하다. 옛날에는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입신출세에 도움이 되었다.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 지금 세상은 책을 많이 읽고 학식이 높으면 존경해 주는가. 그렇지 않다. 책을 읽을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에 연줄 찾아다니고 눈도장 열심히 찍는 것이 세상살이에 더 도움이 된다. 학식이 높은 사람보다 돈 많은 사람이 배필로서 더 훌륭한 자격이 있다. 사람 자체보다 그 사람이 지닌 또는 지닐 재물이 중요하다. 세상은 책을 읽지 말라, 읽지 말라, 외친다. 이런 세상에서 책을 읽자고 말하면 귀담아 듣는 사람이 없을 것은 당연하다. "돈이 있으면 귀신도 부린다."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돈의 막강한 힘은 이미 옛날부터 알려진 것이다. 집에 책이 많으면 돈이 없다는 것은 도둑들의 상식이다. 털려고 들어간 집에 책이 많으면 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책은 돈의 적이고 돈은 책의 적인 셈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돈 잘 버는가를 알려 주는 책을 내면 돈을 번다. 출판사들이 돈 벌려면 그런 책을 내어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출판사가 돈 버는 방법을 일러주는 책만을 낼 수는 없는 일이다.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에 걸쳐 산 김성탄(金聖嘆)이라는 이가 비 오는 날 책 읽는 즐거움을 이야기했다. 공감이 가는 이야기로되 오늘날 그 공감은 책 읽는 버릇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들에게 한정될 수밖에 없다. 즐거움을 주는 것은 책이 아니라도 요즘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다. 집 밖에 나가지 않아도 텔레비전과 컴퓨터가 책보다 훨씬 더한 즐거움을 준다. 책의 적은 텔레비전이고 컴퓨터다. 컴퓨터는 게임과 인터넷에 힘입어 더욱 괴력을 보이고 있다. 어른들은 집에 들어오면 책을 펴들기보다 텔레비전을 켜고 아이들은 컴퓨터를 켠다. 책에 우호적이지 못한 세상 분위기와 세력 왕성한 적들 속에서 책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보다도 책은 과연 살려야 할 물건인가. 책의 재질과 책의 개념을 생각해 보자. 종이에 잉크를 묻힌 것이 책이라는 것은 깨어도 될 고정관념인지 모른다. '서권기'의 '권'은 무엇인가를 둘둘 만 것이다. 아주 먼 옛날 책은 죽간(竹簡)이나 목간(木簡)이었다. 대나무쪽이나 나무쪽에 글자를 쓰고 줄에 꿴 것이 책(冊)이다. 이것을 둘둘 말아 운반하거나 보관했다. 나무 껍질이나 양피지가 책 만드는 재료로 쓰인 때가 있었다. 오늘날 '페이퍼'라는 말은 나일 강변의 갈대로 만든 파피루스에서 온 말이다. 책이 꼭 종이로 만들어져야만 할 이유가 없다. 이미 텔레비전이나 컴퓨터는 변형된 책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과거에 책이 해 왔던 구실을 이제는 여러 다른 매체들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책만이 모든 것이며 으뜸이라는 생각은 시대에 맞지 않다. 적들과의 동침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책은 이미 옛 매체처럼 돼 간다. 우리 경험으로 보면 은 새 매체가 출현해 세력을 잡아도 옛 매체는 그 나름의 특성을 살려 살아남는다. 책은 영향력이 전만 못하다 해도 살아남을 것이다. 매체마다 다른 장점을 서로 살리는 길도 찾아볼 만하다. 텔레비전과 컴퓨터, 또는 이 두 것과 이동전화가 그 길로 가고 있다. 책과 컴퓨터가 사이좋게 다가서는 컴퓨터책(e-book)이라는 것이 이미 등장했다. 그 다음에 해 볼 것은 실낱처럼 가느다란 꿈이지만 인본주의와 인문학의 르네상스를 기다려 보거나 일으키는 것이다. 우리 세상이 아무리 편리해지더라도, 우리를 즐겁게 해 주는 것들이 많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줄 것은 인간이라는 자각에 이르는 것이다. 세상과 사람 마음을 풍요하게 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지혜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오늘날처럼 대학에서 인문 분야가 푸대접 받던 때는 없지만, 좀더 지나면 인문학 전공자들이 우대받는 때가 올 것이다. 인간에 대한 이해 없이 무엇인들 제대로 될 수 있겠는가. 속도와 편리성이 오히려 인간을 괴롭히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에 대한 반동이 일어날 수 있다. 르네상스라는 것이 무엇이었던가. 종교에 눌려 답답한 세상이 오래 계속되다보니 고대 그리스 시절의 인간 중심 사상과 자유정신으로 되돌아가자는 것 아니었던가. 지금 우리는 기술위주, 속도위주, 편의위주의 다그침에 목을 졸리고 있다. 우리가 잃어가는 마음의 여유를 되찾자는 책들이 요즘 관심을 끌고 있음은 우연이 아니다. 이 책들은, 왜 우리가 이 세상을 그렇듯 바삐 쫓기면서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일하려고만 태어난 것인가를 묻고 있다. 저녁 노을을 한가롭게 지켜 보면 우리가 잃었던 아름다움을 다시 볼 수 있다. 비 오는 휴일 누워서 이 책 저 책을 보는 여유를 가져 본다면 그 즐거움이 새삼스러워질 것이다. 책 읽기를 권하기 위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이 책을 잘 읽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위험하다. 우리가 딴 나라 사람들보다 책을 정말 읽지 않는가. 그렇지도 않은 듯하다. 우리만한 인구의 나라에서 백만 권 넘어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쓴 '개미'라는 책은 자국보다 우리나라에서 더 많이 팔렸다. 다만 어느 한 두 분야의 책만 많이 팔린다는 것이 문제일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책을 읽지 않는다고 자꾸 말하면, 책을 읽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심는 것이므로 좋지 않다. 오히려 한국 사람은 책을 많이 읽는다고 말하면 읽지 않던 사람도 읽을 생각이 날 것이다. 동네 작은 서점들이 죽은 것은 안타깝기는 하지만 큰 서점 수가 늘고 그 큰 서점들에 손님이 벅적대는 것을 보면 책 읽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대에 문자향 서권기라는 말은 맞지 않은 말일지 모른다. 그림이라는 것이 이제는 모든 교양인들의 것이 아니고 전문적인 화가들의 영역에 속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그것을 그림 속에서만 찾을 수 있겠는가. 책을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부단하게 인격 도야에 스스로 힘쓴 사람의 모습과 행동에서 문자와 책의 향기는 우러난다. 세상 일을 바라봄에 여유가 있고 경거망동하지 않으며 지켜야 할 도리를 아는 사람에게서 그 향기가 난다. 영상매체에만 길들여지면 생각이 얕고 행동이 가벼워지기 쉽다. 그것을 고치는 것은 역시 책이라고 생각된다. - '책과 인생' 9월호 (2001.0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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