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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으로 일군 결실
지난해 9월 전북 김제시 벽골제에서 펼쳐진 '지평선축제'를 취재했다. 지자체마다 이름만 다르고 내용은 비슷한 축제가 앞다퉈 열리고 있지만 지평선축제는 황금 들녘을 테마로 땅과 사람을 하나로 아우르는 이색축제다. 지평선 논길 걷기, 메뚜기 잡기, 허수아비 만들기, 새끼 꼬기 등 농촌체험을 통해 농부들이 흘린 땀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김제시 부량면 용성리에 있는 벽골제는 농경문화의 상징이 되는 유적지(사적 제 111호)다. 충북 제천의 의림지, 경남 밀양의 수산제와 함께 삼한시대의 3대 수리시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며 오래됐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흘해왕 21년(서기 330년) 에 축조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학자에 따라서는 축조 연대를 마한시대로 추정하기도 한다. 벽골제는 벼와 고을, 제방의 합성어다. 둑 3.3㎞, 둘레 44㎞나 됐다는 벽골제는 간 곳 없고 지금은 수문(水門) 돌기둥 2개만 덩그렇게 남아있다. 일제가 섬진강땜인 옥정호를 만들어 물길을 여는 대신 벽골제를 논으로 만들어 버렸다. 98년 문을 연 벽골제수리민속유물관은 농경문화의 변천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수리시설과 농기구 등을 전시해 놓았다. 신털미산, 되배미산이라는 지명의 유래에서도 당시의 대역사(大役事)를 짐작할 수 있다. 신털미산은 벽골제 공사에 동원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짚신에 묻은 흙을 털거나 짚신을 버린 곳이 산이 됐다는 것이다. 또 되배미산은 인부들을 1명씩 일일이 셀 수 없어 500평되는 논에 지게를 진 사람들이 채워지면 500명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벽골제 가는 길목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소설가 조정래가 대하소설 '아리랑'의 배경으로 이 곳을 택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김제시 위로는 만경강이, 아래로는 동진강이 에워싸듯 흐른다. 만경강 위쪽 이 군산이다. 만경들녘에서 군산까지의 도로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포장된 것은 일제가 농산물을 수탈하기 위한 속셈이었다. 김제(金堤)의 옛 지명은 마한 때는 '볏비리'라 했고 백제 때는 '볏골'이라 불렀다. 모두 '벼의 고을' 이란 뜻으로 농경문화의 요람이다. 김제로 불리게 된 것은 신라 때부터다. 황금 들녘을 보고 그렇게 지었다고도 하고 사금(砂金)아 많아 김제라 불렀다고도 한다. 땅이 기름지면 부자도 많기 마련. 김제시 장화동 후장마을에 있는 쌀뒤주를 보면 이 지역의 쌀이 얼마나 풍부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정사각형의 뒤주는 사방 한 변의 길이와 높이가 210cm로 쌀 70가마를 저장할 수 있는 초대형 뒤주다. 고종 초인 1864년 정준섭(鄭峻燮)이 만들어 사용하던 것으로 1975년 지방민속자료로 지정됐다. 정준섭의 할아버지 정구례(鄭求禮)는 한때 구레 군수를 지낸 토호(土豪)였다. 그 집엔 늘 과객과 식객으로 붐벼 큰 뒤주가 필요했을 것이다. 쌀독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실감난다. 너른 후원은 당시의 부(富)를 짐작케 하지만 정구례 고가(古家)도 낡고 퇴색되어 옛 영화의 그늘로 남아 있다. 어디를 가나 너른 들판이지만 광활(廣活)면 들녘은 이름 그대로 광활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땅과 하늘이 맞닿은 지평선으로 끝간데 없이 아득하다. 누렇게 익은 벼들이 황금물결로 일렁인다. 산들바람에도 벼는 벼끼리 어깨를 부비며 흥겹게 어깨춤을 춘다. 논둑 길 따라 코스모스가 하늘거리고 쪽빛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다. 지독한 가뭄과 모진 홍수를 모두 이겨내고 알알이 영근 벼이삭을 바라보면 농부들이 흘린 땀의 결실에 절로 숙연해진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다'고 읊은 릴케의 '가을날' 시구가 실감난다. 기계 영농으로 예전 보다 농사짓기가 편해졌다고 하지만 농삿일의 고단함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봄비가 내려 백곡이 윤택해 진다는 곡우가 되면 못자리를 하기 위해 볍씨를 담근다. 한 해 벼농사의 시작이다. 부지깽이조차 덤벙댄다는 모내기철이 되면 신 새벽부터 부산을 피웠다. 모내기를 끝내고 한시름 놓는가 싶으면 가뭄이 들어 물대기 경쟁을 벌어야 한다. 또 홍수가 져 논바닥이 물바다를 이루면 얼마 나 마음을 졸여야 하는가. 김매기도 끝나 한가해진다는 뜻의 '어정 7월' '건들 8월'이면 한고비를 넘긴다. 누렇게 익은 벼들이 고개를 숙이면 땀의 결실을 거두는 가을걷이가 시작된다. 농부는 심은 대로 거둔다는 사실을 안다. 씨앗을 뿌리고 가꾸는 가슴속에는 출렁이는 가을이 담겨 있다. 씨앗 속에 담긴 가능성과 잠재력을 알기에 작은 벼를 한 알 심어 땀 흘려 가꾸고 수확의 기쁨을 누린다. 농사는 생명을 가꾸는 일이다. 생명은 탄생하고 성숙하고 열매를 맺는다. 가뭄과 홍수와 온갖 재앙을 극복하고 열매맺는 생명의 능력을 알기에 농부는 한 여름 뜨거운 햇살 속에서 비지땀을 흘린다. 생명이란 비바람을 맞으면 오히려 강해지는 진리를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부는 준비하며 기다리고, 가꾸며 기다리고, 추수 때를 기다린다. 땅을 가꾸고, 곡식을 가꾸는 농부에게서 우리는 근면과 성실을 배워야 한다. 성실 처럼 고귀한 성품은 없다. 농심은 곧 천심이다. 얄팍한 술수로 일확천금을 노리지 않는다. 땀흘린 만큼 거둔다. 그래서 농부의 땀은 값지고 소중하다. 값지고 소중한 것은 비단 농부들이 흘린 땀뿐이겠는가. 산업현장에서 묵묵히 땀흘리는 근로자들의 땀도 소중하기는 마찬가지다. 올 연초 세계 최대의 '떠 있는 발전소'로 일컬어지는 바지복합화력발전소를 건조한 현대미포조선소와 현대건설의 개가(凱歌)도 땀의 결정(結晶)이다. 지금 우리 주변엔 일하지 않고 놀고 먹는‘젊은 캥거루족’이 100만명을 넘는다고 한다. 속칭‘청년 백수'들은 일할 능력도 의지도 거의 없다. 대학졸업 후 직장도 없이 부모에게 얹혀 사는 20∼30대‘기생(寄生) 백수’들을 방치할 경우 사회·경제적으로도 엄청난 부담이 된다. 진정한 행복은 노동을 통한 땀의 결실에서 찾을 수 있다. 땀을 흘려보지 않고서는 땀의 소중함을 모른다. 현대미포조선 사보 2001.09 ------- 시인 일요서울신문 편집인 겸 편집국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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