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 17일 칼럼니스트 COLUMNIST No.321
1999.09.19 창간 서울칼럼니스트모임 (Seoul Columnists Society)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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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박스보다 더 요긴한 휴대폰

항공기 사고를 해명하기 위하여 탑재하는 장치. 검은 상자에 들어 있기 때문에 블랙박스라고도 한다. 항공기가 비행 중에 있었던 운동 또는 외부로부터 받은 충격 등을 자동적으로 기록한다. 이상은 백과사전에 적혀있는 비행기록장치(flight data recorder)에 대한 설명의 일부이다.  

블랙박스에는 사고기의 비행상태를 해명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 5가지의 데이터, 즉 고도·대기속도·기수방위·수직가속도·시간 등이 기록된다. 그래서 사고가 났을 때 되기 블랙박스가 현장에서 회수되기만 하면 정확한 사고 경위나 원인을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지난 11일 테러범에 의해 납치돼 미국 국방부(펜타곤)에 떨어졌던 여객기의 비행기록장치와 조종실의 녹음장치 등 두개의 블랙박스가 사고발생 사흘만인 14일 발견됐다는 소식이다. 이렇게 되면 여객기가 추락하기전의 마지막 순간이 규명될 것으로 기대된다. 다른 3곳에서도 블랙박스들이 어서 발견돼 사건의 경위를 정확히 밝혀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이번의 대참사가 벌어진 직후 사건의 성격을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해 준 것이 있다. 바로 많은 사람들이 필수품으로 갖고 다니는 휴대폰이다. 비행기가 충돌하거나 추락하기 전 승객들이 휴대폰으로 기내상황을 외부에 알려줌으로써 당시의 상황을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된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동시 다발 테러에 동원된 납치비행기 4대 가운데 2대의 승객들이 폭파 직전에 휴대전화를 이용해 지상에 있는 가족 등과 통화한 것으로 밝혀졌다. 국방부건물에 충돌한 AA항공 보잉757기 승객 바버라 올슨이 폭파 직전에 휴대전화를 이용해 가까스로 남편인 시어도어 올슨(미국 법무차관)과 통화했으며, 비츠버그시에 추락한 UA93기의 남자승객이 911응급전화센터에 추락 몇분 전에 전화했다는 것이다.

시어도어 올슨 미 법무차관의 부인이자 CNN 방송의 논평가인 바바라 올슨은 남편과의 2차례 휴대폰 통화에서 납치범이 1명 이상이며, 납치범들이 지니고 있던 무기는 여러 자루의 칼들 뿐이라는 것과  조종사 2명과 승무원 4명, 승객들이 모두 비행기 뒷쪽에 몰려 있다는 등 여객기 납치법들에 대한 구체적 정보와 기내상황을 알려왔다.

또 펜실베이니아주 웨스모어랜드군(郡) 인근의 911 응급전화센터의 한 요원은 UA93 여객기가 추락하기 직전 이 여객기의 남자승객으로부터 “비행기가 납치당하고 있다. 폭발음 같은 소리를 들었으며, 기체에 서 흰색 연기가 나는 것을 봤다"는 전화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밖에 컴퓨터회사 부사장인 피터 핸슨씨는 자신이 탄 여객기 UA93기(유나이티드 항공 소속)가 무역센터빌딩을 들이받기 전 휴대폰으로 아버지에게 "스튜디어스가 칼에 찔렸다. 아마 다른 곳으로 납치돼 가는 것 같다"고 알렸으며, 이 전화를 받은 아버지는 곧바로 수사당국에 신고했다. 피터 핸슨씨는 재미교포 김지수씨(34·보스턴 의과대학 교수)의 남편으로 딸(2세) 등 가족 3명이 변을 당했다.

이처럼 이들의 통화 내용은 사고 직전의 긴박한상황을 생생히 알려준데다 납치범들의 신원을 재빨리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사고 직후 무너진 빌딩 잔해더미에 깔린 생존자들이 구조요청을 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데 사용했던 것도 휴대폰이다. 아쉽게도 휴대폰 덕분에 목숨을 건진 사람은 아직은 없지만 단 한사람이라도 무사히 구조되길 기대해본다.

휴대폰이 이처럼 훌륭한 역할을 하자 일부 신문에서는 "휴대폰이 어느 면에서는 블랙박스보다 더 요긴하다"는 만화내용이 실리기도 했다. 10여년 전 같으면 상상하기 힘들었던 일을 휴대폰이 블랙박스를 대신해서 사고순간의 상황을 알려주었다. 이로써 우리는 휴대폰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똑똑히 알게 됐다.  

휴대폰 때문에 여객기납치사건이 쉽게 해결된 경우가 있었다. 지난 95년 6월21일 승객과 승무원 등 3백65명을 태우고 일본 하네다공항을 출발해 홋가이도 하고다테공항으로 가던 전일본 항공(ANA)소속 보잉747 점보여객기가 이륙한지 37분만에 야마가타 현(縣) 상공에서 50대 남자에 의해 공중납치됐다.

범인은 승객들을 인질로 잡고 15시간 30분 동안 경찰과 대치하다 검거됐는데 당시 납치범이 몇명이고 어떤 자인지, 무슨 무기를 갖고 있는지, 폭발물은 있는 지 등을 알 수 있게 해준 것은 일부 승객들이 갖고 있던 휴대폰이었다. 승객들의 전화로 범인은 혼자이고 평범한 50대 남자이며, 폭발물이 없다는 등의 정보를 얻은 경찰은 손쉽게 승객구출 및 범인검거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21세기 정보화사회를 통신의 시대(인터넷도 이 범주에 속할 것이다)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전화통화는 이제 의식주(衣食住) 이상으로 우리생활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이라는 노래가사도 있지만 요즘 세상사람들이야말로 "앉으나 서나 통신"을 한다고 해야겠다. 앉아서는 인터넷에 몰입하고, 서서는 휴대폰 통화에 여념이 없으니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한 것이다.

이제 누가 우리에게 인간생활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교과서에서 배운대로 의·식·주라고만 답할 게 아니라 통신을 하나 더 보태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40,50대 사람들은 몰라도 10대나 20대는 물론 30대들도 의·식·주·통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들라면 아마도 상당수가 통신이라고 할 것임에 틀림없다.    

사건이 터지고 나서 사람들이 가장 불편하게 여겼던 것도 바로 통신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밤새 미국에 있는 친지의 안부를 묻는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현지사정으로 한동안 전화가 불통되고 휴대전화도 연결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국내 가족들은 연락할 방법이 없어 발만 동동 굴러야만 했다.

e메일로 안부를 물어보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역시 인터넷시대를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이런 일이 아니더라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통신(전화)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하겠다.

이번 사건을 지켜보면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울려대는 핸드폰이 때로는 눈총을 받지만 그래도 현대인에게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이와 함께 블랙박스보다 핸드폰이 더 요긴하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200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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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일
칼럼니스트
월간 인터넷라이프 편집인.편집국장

2001.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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