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7월 28일 칼럼니스트 COLUMNIST No.298
1999.09.19 창간 서울칼럼니스트모임 (Seoul Columnists Society) 주4~5회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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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그러진 욕 세상

풍자와 해학이 담긴 판소리에는 욕설이 많이 나온다. 판소리 열 두 마당 중 '변강쇠타령'은 적나라한 성의 묘사와 노골적인 음담이 전편에 깔려있는 외설적인 내용이어서 소리꾼들조차 부르기를 꺼려한다. 판소리 뿐 아니라 정선아리랑 등 민요 속의 욕설은 노곤한 민중의 삶을 위무했고 양반과 천민의 계급 갈등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여 카타르시스 구실을 했다.

96년 광주에서 열린 '전국 욕대회'는 욕에 담긴 조상들의 해학과 익살을 되살려 삶의 활력소로 삼은 이색행사였다. 출연자들의 걸쭉한 입심은 스트레스를 후련하게 쓸어 내리기에 충분했다. '욕 잘하는 사람 치고 악인이 없다'는 말도 욕에 담긴 솔직성 때문이다. 욕쟁이 할머니가 운영하는 음식점에 욕을 덤으로 얻어먹으면서 고객들이 단골로 찾는 것은 할머니의 욕설 속에 악의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친근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욕이 금 인줄 알아라' '욕이 사랑이다'는 속담에도 '사랑의 매'와 같은 긍적적 의미가 함축돼 있다.

인터넷 웹진 등을 통해 널리 유포된 거친 욕설은 10대뿐 아니라 20∼30대 직장여성들에게도 평상어가 돼버렸다니 여간 한심스러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씨바' '졸라' '뻐큐' '개쉐이'처럼 일부 음소를 탈락시킨 '제2의 욕설'들은 거칠고 상스럽기 그지없다. 온갖 격음과 경음, 성기를 지칭하는 속어를 변칙적으로 섞어 뱉는 유행어로 전락한 욕설은 사회병리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익명의 장막'서 퍼붓는 사이버 세상의 무차별 언어폭력은 이성을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적 사안뿐만 아니라 사회문화 현안 전반에 대해 다른 의견들은 설 땅을 잃고 있다. 적과 동지로 양분된 이분법적 논리만이 판을 친다. 나와 뜻을 같이하면 동지고 나의 의견과 다르면 적이다. 토론과 논리의 규범은 사라지고 살벌한 주장만이 칼날을 세운 채 난무한다. 토론광장이 아니라 성토광장이다. 세무조사를 비판하는 칼럼을 쓴 소설가 이문열씨가 홈페이지에 폭주한 원색적인 욕설과 지역감정을 유발하는 폭언을 견디다못해 일시 폐쇄하기에 이르렀다.

더구나 법조인 출신의 추미애 의원은 이문열씨에 대해 "지식인들이 신문지면을 통해 성장한 후 곡학아세(曲學阿世)한다"고 비난에 가세했다. "가당찮은 놈이…" "×같은…" 등의 '취중욕설'로 장안의 화재가 됐다. "지나쳤다"는 것이 중론이지만 일부 언론이 과잉보도를 했다고 옹호하는 입장도 있다. 야당에서는 "조폭 수준의 폭언"이라고 힐난하고 나섰다. "신사임당 묘소에 가서 반성하라"거나 "욕보존회 영구회장으로 추대한다" 일부단체의 주장은 차라리 애교스럽다.

요즘 정치판의 욕설과 막말은 위험수위를 넘었다. "야당 총재는 아무데나 마구 찌르는 대창, 죽창"이니 "…DJ에 점수를 따려는 가련한 몸부림"이니 하는 여야의 인신공격성 막말은 정치판의 최소한의 품위마저 내 팽개친 진흙탕 싸움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언론사 세무조사에 대해 "재집권 쿠데타의 서막"이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독설정국'이 판을 치자 여야 지도부가 나서 소속 의원들에게 초등학생을 다루듯 '입 조심'을 당부하는 나라가 됐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가. 아무리 정치판이 거칠다고 해도 할말 안 할 말을 가려해야 할 것이 아닌가. 언론상황을 둘러싼 양당의 욕설과 논쟁은 우리사회를 편가르기로 분열시켜 극심한 후유증을 남길 것으로 보인다. 언론과 권력의 갈등에 더해 언론과 언론의 갈등이 혼재된 특이한 갈등관계가 전개돼 갈등과 대립이 아메바처럼 분열되는 양상을 띠고 있다.

민생은 안중에도 없는 정치권의 '멱살잡이식' 욕설과 정쟁에 신물이 난다. 지역간, 계층간 위화감이나 갈등의 골은 완화하려 들지 않고 오히려 대립과 갈등만 부추기고 있는 꼴이다. 욕설로 일그러진 세상, 국민을 아우르는 통합과 상생의 정치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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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섭

칼럼니스트
일요서울신문 편집인 겸 편집국장
담배인삼신문 2001.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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