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7월 3일 칼럼니스트 COLUMNIST No.288
1999.09.19 창간 서울칼럼니스트모임 (Seoul Columnists Society) 주4~5회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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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의 힘

"이 모든 것을 다 이룬 다음에도 그가 유머를 잃지 않아, 진지하게 인생을 살되 지나침이 없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한국전쟁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던 맥아더 장군의 유명한 기도문 중 일부분이다. 이 기도를 통해 그는 자기 아들이 약할 때 자신을 아는 강함과 두려움 앞에서 용기를 갖도록 원했고, 패배에는 투혼을 승리에는 겸허함을 발휘해 주길 바랐다.

그리고 평탄한 길이 아닌 고난과 역경의 삶으로 인도하며, 남을 지배하기 전에 자신을 지배할 줄 알게 해 달라고 기원했다. 이 모든 것들을 지닌 다음에 바로 유머를 잃지 않은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한 것이다.

삶 속에서 유머가 차지하는 비중과 필요성을 이 기도만큼 절실하고 적절하게 표현한 경우는 거의 없을 듯하다. 그렇다. 인간이 지녀야 할 모든 덕목을 충분히 지니고 제 아무리 풍부하게 실현해도 유머감각이 없으면 그 인생은 성공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삶이 지나치게 건조하고 남을 피곤하게만 하기 때문이다. 아니 유머가 없으면 그런 것들을 이룰 수가 없다. 그만큼 유머는 인간이 지니고 이루어야 할 모든 것의 전제조건이고 삶에 윤기를 더해주는 활력소다.

웬만한 아파트 단지나 주택가에 먹자골목이 있듯이 우리 동네도 아예 한 블록이 먹고 마시고 노래하는 가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으레 그렇듯이 잘되는 집이 있는가 하면 파리만 날리다가 간판이 바뀌는 곳도 적지 않다. 손님이 많은 집들은 나름대로 장점이 있다. 음식 맛이 좋든가 값이 적절하든가 아니면 주인이 매우 친절하기 마련이다.

냉면, 불고기, 등심, 갈비 등을 파는 한 음식점도 항시 손님이 떨어지지 않는다. 40대 후반 아니면 50대 초반으로 짐작되는 종업원 아줌마 때문이다. 그녀는 미모는커녕 평범한 용모에서도 처지는 편이다. 목소리 또한 약간 쇳소리가 나는 듯해 자칫하면 남을 편치 못하게 할 여지가 많다. 식당 안에는 좌석이 많아 종업원이 여럿이어야 할텐데 어찌된 일인지 대부분 그녀 혼자 맡아서 매우 바쁘다. 이런 것을 고려하면 손님이 결코 많을 수 없다.

그럼에도 그녀의 유머감각과 뛰어난 순발력 덕분에 그렇게 손님들이 줄을 잇는 것이다. 손님이 술을 주문하면 지난 번에 많이 마셨으니 오늘은 조금만 하라고 꾸중에 가까운 말을 상대가 즐겁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능력이 있다. 일손이 달려 아무리 바빠도 결코 웃음을 잃지 않으며 일일이 유머와 기지, 그리고 재치로 응대한다.

광우병 파동으로 고기집들이 한산해졌을 때 우리가 가니 그녀는 짐짓 놀라는 채 하면서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무랐다. 광우병이 얼마나 무서운 건데 이렇게 오느냐며 특유의 유머로 우리를 웃기더니 하긴 광우병 안 걸렸어도 이미 머리가 돌고 맛이 가서 서민들을 괴롭히는 정치인 등 잘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꼬집었다.

그녀가 주인을 제치고 하도 열심히 적극적으로 일을 하기 때문에 그 가게 주인도 같이 일을 하지만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고 처음에 온 사람들은 그녀가 주인인 걸로 착각한다. 그렇게 자기 일처럼 열심히 하는 모습에 존경심을 갖는다는 손님도 있다. 그녀의 집이 가까운 곳이라 음식점이 문을 열기 전이나 닫은 뒤에도 동네 부근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그럴 때면 그녀는 꼭 반갑게 인사를 하며 누구누구는 언제 다녀 갔는데 왜 그날 오지 않았느냐는 등 손님들의 신상까지 대개 파악하고서 가벼운 농담을 건넨다. 영업 외 시간에도 이른바 세일즈 활동을 열심히 하는 셈이다.

우연한 기회에 그녀의 가정사정을 알게 되었다. 남편은 월남전 부상으로 기동을 하지 못해 거의 누워있다시피 하다가 몇 달 전 세상을 떠났고 자녀 또한 여러 가지가 순탄치 못해 그녀가 짊어진 짐이 보통이 아니었다. 단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살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항시 집과 일터에서 미소와 유머를 잃지 않았다. 아니 그 정도 유머 감각을 지니지 않았다 면 그녀는 이 괴로운 삶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유머의 위력이 그녀의 여러 가지 불리한 점을 극복하여 어느 여자보다 아름다운 모습을 갖추게 했고 갖은 역경 속에서 자신을 버 티고 그 음식점의 번성까지 가져오게 한 것이다..

한 서민의 삶에서도 유머가 이렇게 강력한 영향력을 광범위하게 발휘하는데 이른바 지도층 사람들 가운데 유머감각이 뛰어난 이들이 많으면 그 파급효과는 간단히 계량해낼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할 것이다. 즉 우리들의 삶이 지금보다 덜 고단하고 미래에 대한 기대도 상당히 두터울 것이다. 그러나 역대 정권이나 정치인들 가운데 철학과 유머에 남다른 소양을 지닌 이들이 매우 적었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엉망이 된 이유 중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1970대 후반 즉 유신정권 말기에 TV 코미디 프로를 폐지하려고 기를 쓰던 당시 권력층이 좋은 사례라 하겠다. 당시 텔레비전의 코미디 프로그램들이 저질이므로 모두 없애겠다는 것이 정부의 발상이었다. 억압정치로 국민들의 숨통을 누르고 있으면 저질이건 고질이건 코미디 프로 같은 것을 많이 만들어 국민들의 관심을 비정치적인 것으로 전환시켜야 상식인데 당시 정권은 이를 없애려고 한 것이다. 생존 위기를 맞은 코미디언들은 물론 언론 나아가 평소 그런 프로그램을 즐겨보지 않던 식자층까지도 거세게 반발하자 유신정권은 슬그머니 물러섰지만 유머의 위력을 모르는 무지한 권력이 연출한 한편의 코미디였다.

현재의 권력층이나 정치인들의 유머감각 수준도 당시와 크게 다를 것 없다. 행정부나 국회에서 오간 말들이 이를 반증한다. 권력투쟁이나 여야의 대치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유머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영국 등 선진국 정치인들과는 대조적이다. 예부터 우리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늘 웃는 낯을 하도록 가르쳤다. 그래야 앞으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고 복도 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나라의 간판이라 할 계층에 웃는 낯이 별로 없으니 한심한 노릇이다.

웃으면 건강에 좋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가지 학술적 실험에 의해 확인되었다. 근엄한 이미지로 딱딱한 인상을 주는 독일인들이 근년에 웃음클럽을 만들어 웃기운동을 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못살던 50년대에도 지금보다 세배나 웃었는데 시간은 돈이라는 생각에 너무 쫓기고 살다 보니 웃는 것조차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미국 버클리대학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탈리아 인들은 하루에 19분 웃고 프랑스 인은 18분 웃는다. 영국인은 15분이며 독일인은 6분에 불과하다. 우리는 어떨까. 모르면 몰라도 독인들보다도 훨씬 적을 것이다.

최불암시리즈가 막 퍼지던 무럽이었다. 하루는 최불암씨를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가운데 조심스럽게 그 시리즈를 화제로 올리며 그 기분을 물었다. 아들과 딸한테 처음 그 유머를 들었을 때는 솔직히 찜찜하고 불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니 그것도 사회에 기여하는 한 가지 방법이란 사실을 깨닫고 마음이 편해지고 자기도 같이 기분 좋게 웃을 수 있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자신의 오늘이 팬들 덕분에 있게 되었는데 그걸 통해 조금이라도 보답하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했다.

바꿔 말하면 웃음의 가치를 새삼 깨달은 것이다. 사회적으로 크게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 가운데 이처럼 웃음의 힘을 깨닫는 이들이 많이 늘어야 한다. 서민들도 마찬가지다. 카네기 말대로 웃음은 비용이 별로 들지 않지만 많은 것을 생산하고, 웃음 없이 진정한 부자 된 사람이 없고 웃는 얼굴로 정말 가난해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모든 독을 제거하는 해독제다.

숱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유대인들은 웃음과 해학의 지혜를 키우며 자신들을 키우고 지켜왔다. 웃음이 희망과 여유를 가져다 준다는 점을 어느 민족보다 깊이 깨닫고 실천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느 때보다 많은 시련을 겪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 웃음보다 더 확실한 방향과 지침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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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호

칼럼니스트
'삼성월드' 2001.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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