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5월 29일 칼럼니스트 COLUMNIST No.267
1999.09.19 창간 서울칼럼니스트모임 (Seoul Columnists Society) 주4~5회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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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 보기 *누구나 칼럼 *의견함
두 얼굴을 가진 발신자번호표시 서비스

동성애자인 20대 남자가 인터넷채팅으로 알게된 30대 남자와 서울 시내에 있는 한 여관에서 동침을 하게 됐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동성연애 상대자였던 30대 남자가 잠을 자던 도중 2천6백여만원 어치의 금품을 훔쳐 달아난 것이다. 지난 10일 오전 2시35분쯤 서울 종로구 돈의동에 있는 한 여관에서 발생한 절도사건의 전말이다.

피해자는 범인의 이름도 성도 모르고 어디에 사는지는 더욱 몰랐다. 그러나 완전범죄는 없는 법. 범인은 몇 발자국 가지도 못한 채 잡히고 말았다. 피해자가 4월부터 실시되고 있는 발신자번호표시(CID) 서비스를 받고 있었는데 두 사람이 인터넷채팅을 한 뒤 전화를 걸어 만날 곳을 정하는 과정에서 피해자의 휴대폰에 범인의 전화번호가 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신고를 받고 수사에 나선 경찰은 이 번호를 추적한 끝에 사건발생 하루도 지나지 않아 범인을 손쉽게 검거했다. 발신자번호표시 서비스가 안겨다 준 선물이었다. 만일 이런 서비스가 실시되지 않고 있었더라면 이 사건의 수사는 틀림없이 소극적이었거나, 시간이 다소 걸렸을지도 모른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발신자번호표시라는 새로운 서비스가 이번 일처럼 도둑놈도 잡을 수 있는 것이니 참으로 고마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 서비스는 장난전화나 음란전화를 막을 수 있고, 걸려오는 전화번호를 봐서 싫은 사람의 전화라면 받지 않을 수도 있어 여간 편리한 게 아니다.

이 서비스는 또 국회의원들을 즐겁게 만들고 있는 모양이다.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로 시달렸는데 발신자번호표시 서비스에 가입한 뒤로는 전화스트레스에서 해방되었다고 한다. 단말기에 표시된 전화번호를 읽어보고 알지 못하거나 골치아픈 사람일 경우 안 받으면 되니까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국회의원들에게 걸려오는 전화라는 것이 대부분 민원이 아니면 욕설을 퍼붓는 내용인데 그걸 자연스럽게 예방할 수 있게 됐으니 정말로 기막힌(?) 서비스라고 하겠다. 비방하는 내용일 경우는 상대방에게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고만 말해도 겁을 먹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래서 정치권에서는 이 서비스에 가입하는 것이 대유행이라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이 서비스가 실시된 이후로 지하철이나 버스, 공공장소에서 휴대폰 벨이 울리는데도 발신자의 전화번호를 보고는 받지 않는 경우를 가끔 보게 된다. 벨소리 때문에 주위사람들이 인상을 찌푸리지만 사생활침해를 받지 않겠다는 데는 뭐라고 말할 계제도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이처럼 여러모로 유익한 발신자번호표시 서비스와 관련해 논란이 한창이다. 그저 고마운 일만은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요금을 비싸게 받는 것도 잘 못됐고 송화자의 전화번호를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수신자에게 공개하는 것도 그렇다는 것이다.

우선 유료화 문제를 놓고 통신회사와 네티즌간의 의견이 서로 다르다. 통신회사측은 서비스를 위해 비용이 드는 만큼 일정금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고 네티즌들은 비용이 거의 들지 않기 때문에 무료로 서비스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시비가 되고 있는 것은 개인(송신자)의 정보(전화번호)를 타인(수신자)에게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옳으냐 하는 문제이다. 통신회사가 지켜야 할 「개인정보 보호」의무를 외면한 채 남의 정보를 다른 사람에게 돈을 받고 서비스하는 행위 자체가 비도덕적이라는 것이다.

네티즌들은 전화번호는 비공개를 기본으로 하고 별도로 신청하는 경우에만 공개하는 게 옳다고 말한다. 발신자번호표시 서비스는 전화를 거는 쪽이 상대를 선택하듯 받는 쪽도 똑같이 「선택의 권리」와 「알권리」를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인 만큼 통신회사들이 돈 내는 사람에게만 정보공유권리를 파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모순이라는 설명이다.

더군다나 전화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전화번호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라고 허락한 적이 없는데도 「남의 개인정보」를 돈을 받고 서비스한다는 것은 부당한 처사라고 지적하고 있다.

네티즌들은 새로운 기술도입이 아닌 이상 미국이나 캐나다, 일본에서처럼 무료화해야 할 기본적인 서비스를 통신회사들이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분노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동통신회사들은 당초 발신자표시서비스의 원가가 개인당 3천4백원이 넘는다며 이용료를 월 3천∼3천5백원으로 예정했다가 네티즌들이 강력하게 반발하자 2천원으로 정했다. 하나로통신은 올해 말까지 무료로 제공하다가 내년부터는 월 1천1백원을 받기로 했으며 한국통신은 가정용 2500원, 사업용 2800원으로 정했다.

인터넷 동창회사이트인 다모임과 참여연대가 지난 16일부터 3일간 네티즌 3만5천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의 96.3%가 발신자번호표시 서비스가 무료화 돼야 한다고 답변했고 불과 2.2%만이 유료화에 찬성했다.

무료화 돼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75.6%가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동등한 정보가 제공돼야 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으며, 18.6%는 "원가가 거의 안 들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예상보다는 이용자가 적다는 소식이다. 업계에 따르면 발신자번호표시 서비스 신청자는 한국통신이 16만여명, 하나로통신이 1만5천여명 등 유선에서 20만명이 못되며 이동전화가입자들도 전체 2천7백만명 가운데 5% 정도가 이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발신자번호표시 서비스의 원가가 100원 정도에 불과한데도 통신회사들이 원가의 10∼20배 이상으로 폭리를 취한다는 것은 기업윤리의 측면에서도 크게 어긋난다고 할 수 있다. 통신회사들은 고객에 대한 서비스라는 차원에서 과연 현행가격이 적정한 선으로 조정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화를 거는 사람의 양해 없이 일방적으로 이쪽의 전화번호를 상대방에게 알려주는 방식이 행여 개인정보 보호를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닌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정보화사회에서 이 문제야말로 어느 것보다 우선적으로 고려돼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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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일
월간 인터넷라이프 편집인.편집국장

2001.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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