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4월 15일 칼럼니스트 COLUMNIST No.245
1999.09.19 창간 서울칼럼니스트모임 (Seoul Columnists Society) 주4~5회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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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 보기 *누구나 칼럼 *의견함
시계를 버리고 마음의 골목을

오후 3시쯤이라 지하철 승객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서 있는 사람이 너댓 명에 불과하니 쾌적하다 해도 괜찮을 정도였다. 그 때 행상인 한 명이 다른 칸에서 건너왔다.

얼핏 보니 모양은 다리미 비슷한데 가정에서 사용하기에 매우 편리한 청소기라며 한참 설명을 했다. 하지만 그걸 귀담아 듣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대부분 눈을 감거나 읽을 거리를 보지 않으면 시끄러워 편치 못하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래도 그런 것에 구애받을 터이면 애당초 이렇게 나서지 않았다는 듯이 천연스럽게 그는 계속 떠들었다. 이어 그 제품의 시범순서가 되었다. 바닥에 볼펜인 듯한 물건을 놓고 그 청소기가 감쪽같이 빨아들이는 것을 보라고 소리쳤지만 승객들은 역시 무관심했다.

행상인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진행했다. 그러나 청소기는 그 물건을 흡수하지 못했다. 그는 죄송하다면서 다시 시도를 했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그 청소기는 실패를 했다. 몇 사람이 킥킥거리면서 웃음을 참았고 어떤 이들은 그런 물건이란 것이 그렇고 그렇지 하며 참 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쯤 되면 보따리를 싸들고 다른 칸으로 가든지 차에서 내리는 것이 나을 듯한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곤경에 처한 행상인은 다시 하겠다며 청소기를 이리 맞추고 저리 돌리며 조정했다. 잇따른 실패로 이제는 차안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므로 따가운 시선들까지 감당해야 했다. 약간 허둥대긴 했지만 그는 생각보다 침착하게 세 번째 시도를 했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청소기는 또 임무를 해내지 못했다. 이번에는 몇 사람이 마음놓고 소리내어 웃기까지 했다.

이제야말로 짐을 싸들고 떠날 때였다. 그 불쌍한 행상인은 얼굴이 약간 상기된 채 멍하니 서 있더니 예상과 달리 다시 한번만 더 할 테니 보아 달라고 애원했다. 물건을 파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자신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는 식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재미있다는 듯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그러나 네 번째 시범 역시 그의 각오와 결심을 무참히 뭉개버 렸다. 이번에는 웃는 승객도 없었다.

"죄송합니다. 오늘 이 칸에서 장사는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망했습니다. 그러나 이 물건은 정말 그렇게 형편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에 멋진 시범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는 주섬주섬 물건을 주어 담으며 이렇게 인사를 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돈을 꺼내 들고서 그거 하나 달라고 했다. 행상인의 노력이 무위로 돌아간 것이 너무 안쓰러워 사주는 것 같았다. 그러자 또 다른 사람이 자기도 사겠다고 나섰다. 이어 여기저기서 얼굴에 웃음을 띄며 손을 내밀었다. 얼른 보아도 열 명은 넘었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는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며 다른 칸으로 옮겨갔다.

성능 실험에서 이미 실패한 그 물건을 사람들은 왜 샀을까. 그것도 얼굴에 웃음을 띄어가 면서까지. 그들은 집에 가서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더라도 그 행상인을 비난하지 않고, 생각보다 제품이 훌륭하면 물건과 그를 포함해 칭찬했을 것이다. 그들은 소형청소기가 아니라 행상인의 침착하고 여유 있는 태도를 사고, 자신들도 모처럼 부담 없이 한번 웃어본 흐뭇함을 소중하게 여겨 기꺼이 지불한 면이 컸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숨 한번 길게 쉬지 못할 정도로 급박하게 돌아가는 우리 사회에서 여유와 침착은 비경제적, 비능률적인 것으로 왜곡되어 왔다. 그래서 너도나도 숨가쁘게 허덕이며 쫓기는 생활에서 오랜만에 넉넉함과 침착함을 접하고 적은 액수이지만 흔쾌히 지갑을 연 것이다. 어쩌면 승객들의 그런 심리를 겨냥한 즉 실패를 가장한 상술이었을지도 모른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 행상인을 욕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생활 주변이 좀더 여유 있고 침착하게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는 하루하루 급류에 떠내려가고 있다. 아니 홍수 때 산사태를 만나 정신 없이 휩쓸려 가는 모래나 자갈과 다를 바 없다.

우리 사회는 직선과 속도가 철저히 장악하고 있다. 돌아가거나 늦은 것은 바로 패배를 의 미한다. 유럽개발은행 총재를 지낸 자크 아탈리는 그의 저서 '미로, 지혜에 이르는 길'에서 속도와 직선에 사로잡힌 사회는 끈기, 느림, 호기심, 유연성 등의 덕목을 잃고 맹목적으로 내닫기만 한다고 지적했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이처럼 숨가쁘게 질주하는지 스스로 물어볼 틈마저도 없이 앞으로만 달리고 있다. 모두 숨을 몰아쉬며 뛰는 판이라 옆 사람과 차분하게 말 한마디 나눌 여가도 없다. 그 대열에서 탈락하면 바로 패배로 직결되는 터라 뒤와 좌우를 돌아보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이런 상황에서 위기가 닥치면 사람들은 갈팡질팡하고 허우적거리게 마련이다. 지하철의 그 행상인처럼 곤경에 놓였을 때 침착하고 냉정하게 그리고 그처럼 여유 있게 위기를 벗어날 능력을 당신은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가. 자신 있게 대답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자크 아탈리가 지적한 끈기, 느림, 유연성 등을 잃은 지 너무 오래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어떤 사태에 부딪혔을 때 냉정하고 침착하게 그리고 여유 있게 타개할 원천인데 우리 는 아무 쓸모 없는 쓰레기처럼 내다 버린 것이다.

이제는 그런 것들을 되찾아 올 때다. 그렇지 않으면 홍수나 산사태에 휩쓸려 유실되는 자신을 결코 구하지 못한다. 속도와 직선의 횡포에 당하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조절할 수 있도록 하자는 말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로버트 레빈에 따르면 시간에는 시계시간과 사건시간이 있다. 배가 고프 지 않아도 12시이기 때문에 점심을 먹는 것은 시계시간을 따르는 것이다 오전 11시거나 오후 2시에라도 배가 고프면 식사를 하는 것은 사건시간을 따르는 것이다. 사건시간이란 자연 상태를 따라가는 것이다. 또 한가지 예를 들면 오후 6시에 만나자고 한 것은 시계시간 기준인 반면 해질 무렵으로 정하는 것은 사건시간을 따른 것이다. 즉 시계가 없던 시절의 약속 방법이다.

산업사회는 시계시간의 지배를 받고 있다. 우리가 속도에서 자유롭지 못한 원인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가끔은 시계를 무시하고 자연에 맡기며 살아보자. 바로 그런 데서 몸과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골목들이 사라져 가고 있다. 직진에 방해가 되는 비능률의 대명사로 낙인찍히며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우회나 느린 것을 참지 못하는 우리들의 생활태도, 사고방식이 골목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직선과 대로가 지니지 못한 것을 골목은 많이 가지고 있다. 평소에 건성으로 지나치던 것을 자세히 볼 수 있으며 삶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다. 또 자신을 되돌아볼 여지가 많다. 초고속으로 달리는 직선에서 접하지 못한 인생의 여러 가지 면모를 다각도로 볼 수 있다. 그것 역시 여유의 원천이다. 꼭 실재하는 골목이 아니라도 좋다. 대신 마음의 골목을 스 스로 만들어 가끔 어슬렁거려 본다면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거나 새로운 면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이 오늘의 질곡에서 우리를 조금쯤 벗어나게 해주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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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호

칼럼니스트,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신협회보' 4월호 (20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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