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는 지킬 수 있게 해야 지켜진다

지키자 지키자 아무리 해도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교통 질서나 무슨 질서나 그것이 지켜지게 하자면, 그럴 만한 최소한의 장치를 해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은 대체로 이기적이며 더구나 다중이 되면 이성보다는 정황에 쉽게 지배당하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용산역에서 명절 귀성 열차의 좌석을 차지하려고 너도나도 층계를 달려 내려가다가 밀리고 엎어지고 그 위에 덮쳐지고 하여 사람이 여럿 죽고 많이 다쳤다. 삯이 비싼 급행열차는 좌석이 지정되지만, 완행인 보통열차는 먼저 잡는 것이 자리 임자였다. 그까짓 자리 때문에 사생결단하고 달음질해야 했느냐고? 그 시절 완행 열차를 타 보지 않았으면 모른다.

역마다 쉬는 완행 열차로는 대전까지 가는 데만 다섯 시간 반이 걸리던 때다. 고향이 멀어서 열 시간 안팎을 복닥이는 차내 통로에 내내 서서 시달려야 한다고 생각해 보라. 정거장 층계에서 뛰지 말라 암만 해 봐야 뉘라고 뜀박질하지 않을 수 있는가. 열 시간을 편안하게 보내고 싶어 잠깐 뜀박질하는 것을 무리라고 볼 수 없다. 장거리 승객에게만이라도 임시로 좌석제를 했더라면, 그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줄서기라고 하면 영국 사람들 칭찬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식량 배급소 앞에 줄섰던 사람들이 공습경보가 울리면 방공호에 들어갔다가 경보 해제 뒤 다시 줄을 서는데, 흩어지기 전의 줄 그대로가 된다는 이야기다.

영국 사람들이라고 다 신사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줄을 제대로 서게 하는 무엇이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줄 중간에서 배급이 끊기지는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을 것이다. 사람 숫자도 중요하다. 사람이 많아질수록 질서는 흐트러지기 쉽다. 정부가 배급소를 적정하게 배치하 고 어느 한 곳에 너무 많은 사람이 몰리지 않도록 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 평소 잘 아는 사이냐 면식이 없는 사이냐에 따라 줄이 잘 복원되느냐 않느냐가 결정될 수도 있다.

우리 시내 버스 승객의 줄서기는 대체로 예전보다 잘 지켜지고 있다. 국민 의식이 성숙했다는 점보다는, 전보다도 버스 타기가 수월해졌다는 점이 더 큰 이유일 것이다. 전과 달리 줄을 서게 하는 장치가 돼 있다. 여러 버스 노선이 겹치는, 혼잡한 정류장에는 노선 번호별로 팻말이 따로 세워져 있어 그 앞에 서 있으면 된다. 그런데 예전에는 팻말이 하나밖에 없는데 버스는 많아, 버스 서는 지점이 일정하지 않았다. 버스에 오르려면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했다. 학교에서 아무리 줄을 서야 한다고 배웠어도 실천할 수 없었다. 팻말 앞에 버스가 정확히 선다는 믿음이 있어야 줄을 선다.

차를 운전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합법적으로 유턴할 수 있는 곳이 멀지 않은 곳에 마련돼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으면 무리하게 아무데서나 불법 유턴을 하겠다는 생각이 줄어든다. 좌회전 금지 표지판 때문에 네거리를 한 번 지나쳐 버리고 나면 초조해진다. 얼마나 더 가야 되돌이를 할 수 있을지 불안하다. 좌회전 금지판 곁에, 몇 미터 더 가면 되돌아 올 수 있다는 표지판이 있다면 그 불안감은 사라질 것이다.

속도 줄이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곳에는 주의 표지판만 세워 놓기만 할 것이 아니라 노면을 긁어 놓아 '드르륵' 소리가 나도록 하면 더 큰 경각심을 줄 수 있다. 새 길 만들 때 갓길바닥은 전부 긁어 놓는 것이 좋겠다. '사고 자주 나는 곳'이라는 표지판도 효과가 있다. 다른 나라에서 본 것인데, '사고 다발 지역'이라고 쓰고 해골을 그려 놓은 표지판도 있었다. 이쯤 되면 너무 섬뜩해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효과는 확실히 있을 것이다.

차를 끌고 나갔다가, 정확하지 않거나 적절하지 못한 도로표지판 때문에 당황하여 사고를 낼 뻔한 적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아직도 표지판만 믿었다가는 낭패를 보기 쉽다. 따라가다 보면 어딘가에서 슬그머니 사라진 목적지 표지가 사람을 난감하게 하고, 갑자기 나타난 방향 전환 표지가 몹시 당황케 한다. 틀리게 적은 표지판, 너무 작은 표지판, 글자를 잘 읽을 수 없는 표지판, 헷갈리게 해 놓은 표지판 때문에 사고가 났다면 책임을 운전자에게만 물을 수는 없다.

교통이란 시간과의 싸움이다. 누구나 길에 나서면 마음이 바쁘다. 조금 참고 질서를 제대로 지키는 것이 오히려 시간을 줄이는 길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수가 많다. 자동차 생활의 역사가 짧은 우리는 더욱 그런 듯하다.

미국의 소도시에서 네거리가 혼잡해지자 경찰관이 신호등을 노란 등만 깜빡이게 바꿔 놓는 것을 나는 호기심으로 지켜 보았다. 손으로 신호하려는 것이겠거니 했는데 그는 유유히 자리를 떠 버렸다. 네 방향에서 오는 모든 차들은 네거리에 도착하는 대로 멈춰 누가 먼저 도착했는지를 살핀 뒤 차례로 출발했다. 소도시 2차선 도로라 이런 방법이 통하지 대도시 8차선 도로라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차들이 뒤엉키지 않고 술술 빠져 나가는 것이 신기했다.

진행과 정지를 지시하는 신호등을 끄니까 오히려 차가 더 잘 빠진다는 것은 여간 흥미로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해도 질서가 지켜지는 까닭이 무엇일까. 서로들 질서를 지켜야 빨리 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게 달까. 이 사람들이 모두 착한 준법자일까. 나는 운전자들의 상호 감시라는 것이 더 큰 요소라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무리하게 나아가다 남의 차를 받았다면 목격자가 많아 참으로 불리하다.

질서가 지켜지려면 그것을 지키게 하는 유형 무형의 장치나 압력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 표지판이나 사람들 눈이 그런 구실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믿음을 주고 미리 알려 주는 것도 필요하다. 마지막 장치는 법적 제재인데, 법이 강한 이에게 흐물흐물하고 약한 이에게 추상같다면 법도 별 볼 일 없다. 믿음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질서란 결국 믿음이라는 바탕이 있어야 지켜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기면 불리할 수밖에 없다는 믿음 말이다.

박강문 (대한매일 디비팀장)
'신호등'(도로교통안전관리공단) 1999.10

서울칼럼니스트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