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매일 1999.2.19 금 5판 10판
남부지방의 광주와 중부지방의 광주가 분간되지 않아 불편하다는 이들이 있
다.미국에는 워싱턴이라는 지명이 수만 개가 있고 링컨이라는 곳이 수천 개
가 있으니,거기 사람들 엄청나게 불편하겠다.
프랑스에는 영국과 미국,독일 사람이 관광하러 많이 와도,도로표지판이나
관광명소 안내판이 프랑스말로만 돼 있다.파리에서 북역에 나가 독일 쾰른
가는 열차표를 사려고 아무리 안내판을 보아도 찾을 수 없다.쾰른이 아니라
콜로뉴를 찾아야 한다.
세계적 금융 중심지며 교통 요지인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중앙역에는 유럽
각국의 수많은 열차들이 닿고 떠나는데,역 구내 안내판들은 독일말 한 가지
로만 돼 있다.어른(에어벡셀)요금과 아이(킨트)요금 구별 안내도 독일어로만
씌어 있다.스웨덴 스톡홀름 지하철 역의 모든 안내판도 스웨덴말로만 돼 있
다.
벨기에에는 프랑스말에 가까운 왈롱을 쓰는 지역과 네덜란드말에 가까운
플라망을 쓰는 지역이 따로 있다.수도 브뤼셀도 대략 반반으로 나뉜다.
브뤼셀 외곽 순환고속도로를 도는 동안 왈롱말로 Mons(‘산’이라는 뜻)라고
하는 도시 이름을 적은 표지판이 플라망 사용 구간에 들어가면 갑자기
Bergen으로 바뀐다.Mons와 Bergen은 같은 도시며 브뤼셀 남쪽에 있다.
우리는 친절하다.외국 관광객을 위해 도로표지판에 로마자를 함께 쓴다.지
하철 역 이름도 그렇게 해 놓았다.지하철 차내 방송은 영어를 곁들인다.‘나
가는 곳’과 ‘차 타는 곳’,‘표 사는 곳’도 영어로 함께 표시해 놓았다.
우리 서울보다 관광객이 많은 베이징에서는 볼 수 없는 친절이다.
앞으로 우리는 중국과 일본 관광객이 편하도록 한자까지 도로표지판과 간판
에 쓰게 될 것 같다.
한자로 적어 놓으면 그들에게 편리한 점이 있을 것이다.그러나 편리함만 있
는 것일까.가령 ‘청주’라는 도시 이름을 ‘칭저우’나 ‘세이슈’라고 읽
어서 도움될 것이 무엇일까.한자라 해도 간체자를 쓰는 중국 대륙인은 우리
가 쓰는 번체자를 잘 읽을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남의 나라에 가면 우선 도로표지판과 간판이 낯설고 풍습 같은 것이 달라
불편한 점이 많다.그 불편을 감수하는 것은 제 나라에서 보지 못하거나 느끼
지 못하는 것을 경험하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내 나라 안과 다를 바 없다
면 외국 여행하는 맛이 없다.
우리와 비슷하게 이민족의 압제를 받은 아일랜드의 더블린에 가서 한 가지
실망하는 것은,간판 표기는 물론이고 모든 언어생활이 켈트어 아닌 영어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간판들을 읽을 수 없어 불편하다고들 한다는데,프랑스
나 태국이나 이스라엘에 가서도 그리 말할까.이 말 속에 한국에 대한 오만은
없는가.오히려 한글 간판이 한국을 느끼게 해 줄 수 있다.어떤 이들은 한글
로 된 간판과 도로표지판을 빼면 일본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말하기도 한다
는 것 아닌가.
외국 관광객은 따뜻하게 맞아야 하지만 우리 사회생활의 기본 체제를 그들
본위로 바꿀 필요가 있는지 생각해 보자.한자를 써서 편리한 점과 불편한 점
이 있고,한글을 써서 편리한 점과 불편한 점이 있다.어느 쪽이 우리에게 나
은지,나은 쪽을 따르면 된다.외국 관광객은 간판이나 도로표지판이 아니라 우
리 생활,우리 문화유적,우리 풍광을 보러 온다.
<편집국 부국장 pensanto@daehan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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