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매일 1999.2.19 금 15판 20판
다수의 노벨상 수상자가 포함된 석학 100명이 지난 2,000년간의 중요한 발
명품으로 꼽은 것들을 한 인터넷 사이트가 소개해서 최근 화제가 되었다.꼽
힌 것 가운데 ‘돋보기’가 있었다.
이것을 꼽은 이유가 재미있다.“시력이 좋은 연령층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
을 막았다”는 것이다.연령이 많은 층이 경험 적은 젊은 층의 경솔과 독단을
막아 인류 역사에 공헌했다는 뜻인 듯하다.
지금 나이 든 분들은 사랑채에 기거하는 할아버지가 헛기침 소리의 강약과
빈도만으로도 가족 성원의 행동과 태도를 지배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외출
때 노인이 꼭 지니던 돋보기 안경집과 곰방대는 권위의 상징이기도 했다.
동네에는 호랑이 할아버지가 한 분씩은 있어서 젊은이들의 못된 짓을 호되
게 꾸짖었다.아무리 망나니 같은 젊은이도 그 앞에서는 다소곳해졌다.
물론,돋보기가 없던 더 오래 전의 시절에도 나이 든 분의 권위는 무거웠다.
지금은 나이가 좀 많은 분이 젊은이를 꾸짖었다가는 봉변하기 십상이다.버
스 안에서 시끄럽게 이동전화를 쓰는 여대생을 나무랐다가 40대 후반의 교수
가 발길에 차였다는 이야기가 며칠 전 신문에 났다.왜 반말을 하느냐고 학생
이 교수에게 대들면서 싸움이 붙어 여학생이 발길질을 했다는 것이다.
서로의 신분이 밝혀진 것은 난투극이 끝난 뒤지만 어쨌든 젊은이가 싸움에
자신이 있다고 해서 아버지뻘 되는 이에게 완력을 썼다는 것은 한심한 일이
다.
좀 지난 이야기지만 대학교 구내 좁은 길에서 서로 차를 몰고 맞닥뜨린 교
수와 학생 사이에 시비가 붙어 학생이 교수를 치고받은 일도 있었다.
학생이 때리고 교수가 맞았으니 신문에 난 것이지,알려지지 않은 연장자 구
타는 적지 않을 것이다.아버지를 때리는 못된 아들도 신문에는 가끔 난다.우
리 사회가 이제 완력이 앞서는 정글이 되었는가.
외국 사람들이 칭송하던 한국인의 경로사상은 급속도로 퇴색하고 있다.버스
나 지하철 차칸에 노약자석이 있지만 흔히 그 자리를 멀쩡한 젊은이들이 태
연히 차지하고 있다.만원이 되더라도 그 자리는 노약자를 위해 비워 둬야 하
는 자리인데 나 몰라라다.
나이 든 분들이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은 전에 제대로 후대들을 교육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급변하는 사회환경의 영향이 크다.예전에는 나이
많은 이들이 지식과 경험이 많았고 그것이 유용하게 쓰였는데,요즘에는 그렇
지 못하다.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지식은 예전 같은 내구성이 없다.더구나 경
제 사정이 나빠지면서 적응력 떨어지는 ‘고령 인력’이 대거 밀려나는 판이
되었다.
확실한 것은,학교 안 찻길이나 버스 속에서 연장자를 때린 그 젊은이도 나
이를 먹게 된다는 것이다.또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자신들이 한 행패와
똑같은 대접을 훗날 뒷세대들에게서 받기 쉽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고려장 이야기가 있다.한 남자가 늙은 아버지를 산에다 져다 버
리고 돌아가려 하자,따라간 어린 아들이 지게를 챙겼다.나중에 저도 아버지
를 져다 버려야 하니까 지게를 간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이것을 보고 남자
가 노친을 다시 지고 내려왔다는 이야기다.
<편집국 부국장 pensanto@daehan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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