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극복 이데올로기의 종언(終焉)

                              박 강 문(朴康文) 
                                   <서울신문 과학정보부장>

  칠전팔기(七顚八起)의 도전과 고진감래(苦盡甘來)의 성공은 옛날
과 마찬가지로 이 시대의 영웅전에서도 사람들에게 감명을 준다.다
만 이 시대의 영웅은 젊은 나이에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이라는 것이
좀 다를 뿐이다. 애플 컴퓨터를 만든 스티브 잡스인지, 마이크로소
프트의 빌 게이츠인지, 또 는 둘 다인지, 하여튼 처음 사업을 시작
할 때 차고에서부터 했다는 것이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는 모양
이다. 

  그런데, 미국 주택의 차고라는 것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눈비가 
들이치고  허름한 벽틈으로  사정없이 찬바람이 새어드는 헛간 같은 
것은 아니다. 차고도 차고 나름이겠지만  얼마든지 안락한 작업장이
될 수 있을 만한 장소다. 전기요금도 싸겠다,냉난방 설비만 해 놓으
면 그대로 좋은 작업장이 된다.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  미국 대통령 에이브라함 링컨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켄터키 주의 조그마한 마을 통나무집에서 태
어난 링컨은 가난하지만  성품이 정직하고 공부도 부지런히 해서 변
호사도 하고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미국 대통령의 이야기가 왜 아시아의 한 끝에 있는 대한민국의 국
정 교과서에 실려야 했는지 알 수 없지만,링컨이 태어나던 시기라면 
켄터키 농촌에서 통나무집이라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던 가옥 형태였
을 것이므로 이것이 가난의 상징은 될 수 없고 그의 집이 딴 집보다
더 가난했을 이유도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나이든 분치
고 농촌 출신이라면 초가집 에서 태어나지 않은 분이 드물 것이다.
초가집이 우리 농촌의 일반적인 가옥 형태였으므로 초가집에 산다고
해서 다 가난한 것은 아니었다.

  국민학교 교과서에는 에디슨 이야기도 있었다.에디슨은 어릴 때 열
차 안에서 신문을 팔았다.어려움을 이기고 자기 앞길을 펴 나가는 소
년의 이야기로서 우리들에게 각인되었다. 그러나,에디슨은 그 나이에
스스로 신문을 만들 만한 공간을 열차 한 구석에 확보하고,작은 규모
일지라도 인쇄기까지 갖추고 있었다.에디슨은 천부적인 발명가였지만,
경영 수완도 훌륭했다. 이미 청년기에 회사를 여러 개 거느리는 엄청
난 갑부가 되었으며 만년을 상류사회 명사로서 대통령을 포함한 정계
거물들과 함께 놀면서 지냈다.이 사실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
다.

  생각해 보면, 가난을 딛고 일어나게 하기 위해 '가난 미화(美化)'까
지도 하던 '가난극복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지배해 왔고 또 그 영향이 
계속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아무래도 너무 많은 가난 미화와
가난 극복에 관한 교과서로 공부해 온 성 싶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의 이야기에서도,그가 어려운 가운데서 시
집 못간 딸과 함께 판각 작업을 했으나,시대에 앞선 선각 때문에 오히
려 국가기관의 핍박을 받은 것으로 우리는 배웠다.오늘날 일부 논자들
은 이 점에  의문을 나타내고 있다.판목을 구하고 지도를 새기는 작업
은 돈이 없고서는 할 수 없다.김정호 자신이 돈이 있거나 누군가의 후
원이 있었어야 한다. 그가 가난했다는 기록도, 관재(官災)를 입었다는
기록도 없다고 한다.

  빌 게이츠만 해도 두뇌와 적수공권(赤手空拳)만으로 오늘의 그가 된
것은 아니었다.유명인사들에 줄을 댈 만한 사교력이 있고 재력도 있는
어머니가 음으로 양으로 뒤를 받쳐 주었다. 링컨도 셋방에서 태어나지
는 않았다.어릴 적 에디슨은 천진스럽게 공상의 날개를 펴면서 그것을 
실천할 만한 환경에 있었다. 

  어떤 일을 이루려면 기반이 있어야 하고 그 기반은 풍족할수록 좋다.
가난이 결코 좋은 기반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가난을 극복하려는 의
지가 때로 성과를 올리게 할 수 있다. 가난하다고 해서 나중에 성공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그만큼 힘들다. 그러기 때문에 그 어려움을 딛
고 성공한 사람을  더욱 칭송한다. 그러나 가난을 미화까지 할 필요는
없다. 과학 기술분야에서 좋은 연구 결과를 내려면  그럴 만한 기반이
필요하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가난극복 이데올로기가 경제 발전에 큰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60년대에 들어서서 '잘 살아 보세,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 노래 부
르며 더욱 매진해 어지간히 가난에서 벗어났다. 부분적으로는 '소비가
미덕인 사회'도 이룩했다.빛나는 부분이 있으면 그늘지는 부분도 있다.
가난극복 이데올로기의 성과에서도 마찬가지다.

  요즘 호화로운 혼수(婚需) 때문에 말이 많다. 혼수를 푼푼하게 해 오
지않았다고 해서 의사인 신랑이 어머니와 합세하여 신부를 때린 사건이 
보도되었다. 함값이 적다고 투정하는 함진아비패의 요구액이 때로는 몇
백만원이나 되니 세상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다.  있는 사람들 층에
한정되지 않고, 어려운 층에도 강요되는 악습이다. 함값 10만원 제대로 
못 주는 것을 비관한 신부 어머니가 자살한 일도 보았다. 

  요즘 아들딸 혼인시키는 부모라면 나하고 비슷한 50대나 60대의 나이
이므로 새 나라 대한민국의 교육이념에 따라 교육받은 세대다. 이 세대
들이 지금 혼수 타박을 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홍익인
간'(弘益人間)이란 교육이념은 교육법에만 있을 뿐이고 이 세대에 실제
로 큰 영향을 준 것은 가난극복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생각되기 때문이
다. 

  가난극복 이데올로기는 한 뱃속에서 경제 발전과 함께 배금주의(拜金
主義)를 키워서 낳았다.배금주의는 우리 사회를 안개처럼 덮고 있는 것
같다. 국사를 맡은 사람들까지 돈 먹었다는 죄목으로 줄줄이 묶여 들어
가는 것을 번번이 본다. 이 분들도 대개  50대에서 60대에 걸치는 연령
대다. 그러면 그 밑층은 나은가. 여러모로 들어 보면 더하면 더하지 나
을 것 같지않다고 한다.더 타산적이고 더 이악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
다. 

  배금주의는 '상대적 빈곤감'과 '박탈감'이라는  정신적 병증을 불러
왔다. 우리는 진시황보다 잘 입고 잘 먹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
교 대상은 바로 이웃이고 동시대 사람일 수밖에 없다.나도 남만큼 넓은
아파트에 살고 땅도 두고 싶고 골프도 즐기고 싶다.화랑 사다함이 지키
던 신라의 국고서 곡식을 훔쳐낸 것은 배고픈 이들이었지만, 요즘 도둑
질의 대부분은 배고픔 때문이 아니다. 남이 누리는 만큼 누리려,남보다
더 누리려, 훔치거나 빼앗는다.

  누구나 불만이고 만족한 사람을 찾기 힘들다. 가진 사람도 더 가져야
하 니 늘 허기를 떨치지 못하는 '가난한 부자'를 면치 못한다. 누구나 
장수처럼 돈을 벌고 싶어 한다.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사람은 장사를 할
일이다. 지금이야말로 정신의 공황기가 아닌가 싶다.  

  옛 선비가 나물 먹고 물 마시고도  냉돌에 앉아 공부하던 것은 단순한 
호학(好學)이라서일 수도 있지만, '책 속에 엄청난 재물이 있다'(書中自
有千鍾祿)는 꼬드김 때문일 수도 있다.과거에 급제하여 관리가 되면, 일
순에 신세가 펴지는 것이다. 학문의 길에도 일찌감치 영화(榮華)의 유혹
이 있어 온 셈이다.우리나라 학계에 나도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면,
"거기도 인간세상인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하는 것은 학자
들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다.그 세계에 존경할 만한 스승도 여러 분 계시
기 때문이다.  

  끝없는 신분상승 욕구와 새로운 권위주의도 가난극복 이데올로기를 거
름으로 하여 자랐다.정치는 그런 대로 어쨌든 탈권위주의 방향으로 가는
듯한데, 사회 각분야는 오히려 위계(位階)를 따지는 권위주의가 더 심해
졌다.교회 목사면 다같은 목사로 통하는 줄 알았는데 당회장이란 제도가
언젠가부터 생겼다.  계열회사를 거느리는 재벌 총수를 사장과 구별하여
회장이라 하더니 총회장이란 명칭도 있다.대학 홍보담당부서에서 신문에
내 달라고 대학 인사(人事)내용을 보내오는 것도 전에 보지 못하던 풍습
이다. 학장,처장,어학원장,교내신문주간, 방송주간,영자신문주간 이름까
지 나온다. 대학사회도 이젠 사다리 타기가 관청이나 회사하고 비슷해졌
나 보다. 교수들이 나이 들어 보직 하나 얻지 못하면 섭섭해  하는 것을
알 만하다. 

  우리는 이제 가난극복 교과서 읽기를 끝내고 안분(安分)과 안분(按分)
의 교과서를 읽어야 할 때인 것 같다.분수를 지키고 욕망을 줄이기란 너
나없이 어려운 일이다. 과부 할머니가 평생 모은 재산을 선뜻 학교에 내
놓는다. 이런 일이 그 교과서의 한 단원(單元)이다. 　     

월간 '과학과 기술'(19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