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등 국민과 이등 국민으로 가를 셈인가
- 영어를 공용어로 삼는 문제에 대하여


영어를 우리 공용어로 하자는, 소설가이자 경제평론가인 복거일씨가 신문에 쓴 주장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 뒤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 인사가 텔레비전 토론을 벌이게까지 되면서 이 문제는 별로 놀랄 만한 것같지 않게 되어 버렸다. 지난해(1999년)에 이 일들이 일어났는데, 올해에는 찬성하는 쪽 사람들이 기뻐할 소식이 일본에서 들려왔으니, 다름 아니라 그 나라 총리 자문기관이 영어를 일본의 둘째 공용어로 쓰자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이 때다 싶은지 영어를 공용어로 삼는 데에 찬성하는 한국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불거져 나온다. 이제는 반대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나 편협한 민족주의자 쯤으로 몰아가는 듯한 분위기마저 느낄 수 있다.

복거일 씨는 영어를 공용어로 삼는 일이 도량형의 국제적 표준인 미터법을 도입해서 전통적 척관법과 함께 쓰는 일과 비슷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언어는 됫박이나 저울 따위처럼 단순한 것이 아니다. 한국어에는 한국 민족의 역사와 전통과 정서가 담겨 있다. 아무래도 이 문제에 반대하는 의견을 펴자면 정서적인 부분이 많게 되는데, 민족에게 민족어만큼 정서적인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한 민족을 다른 민족과 가장 확실하게 가르는 것은 언어다. 한국어가 있어서 한국 민족은 한국 민족이다. 이래서 애국 선열은 우리말 우리글을 지키려고 했으며, 침략자 일본은 한국어를 없애려 했다. 말을 지켜 오지 않았으면 우리는 진작 딴 나라의 일부가 되었을 것이며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어를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한국어와 함께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것인데, 왜 그리 걱정이냐고 하겠지만, 두 가지 언어를 공용어로 하는 것은 미터법과 척관법을 병용하는 문제와 엄청나게 다르다. 영어를 한국어와 함께 공용어로 했을 때 어떤 일이 생길까. 국민은 두 계층, 영어를 하는 계층과 그러하지 못하는 계층으로 갈라질 것이다. 그 사이의 골은 지난 시대의 진서 계층과 언문 계층만큼이나 깊고 넒게 벌어질 것이다. 일제 식민정치 아래서 일본어를 하지 못해 설움을 당했듯이, 영어 모르는 설움을 또 당해야 할 것이다. 영어를 할 줄 아는 계층은 자신들을 일등 국민으로 여기고 영어를 할 줄 모르는 남들을 이등 국민으로 괄시하게 될 터인데, 이것이 사회 통합에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인도에서는 영어 사용자와 영어 아닌 언어의 사용자 사이에 나타나는 위화감이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복거일 씨는 영어 공용화가 교육 기회의 불평등을 줄인다는 주장도 폈다(자유기업센터 뉴스레터 2000년 1월 25일). "지금 많은 사람들이 비싼 수업료를 내면서 영어 학원에 자식들을 보내고, 적잖은 사람들이 자식을 해외로 유학을 보낸다. 영어가 이미 생존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기술이 된 터라, 그런 사정은 부의 세습을 뜻한다. 영어를 공용어로 삼으면,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영어를 배우는 기회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정부도 영어 교육에 투자를 더 많이 하게 되어, 교육 기회의 불평등은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과연 그러할까.

대학 입학 시험 준비를 위한 과외 수업의 경우를 보자. 여기에 지출하는 비용은 막대하다. 부자들이야 별 것 아니지만, 많은 가정이 이 비용 지출로 고통을 받는다. 형편이 어려운 가정은 해 볼 수도 없다. 이런 과다 지출과 빈부에 따른 불평등을 해소하겠다고 정부는 학교마다 자율 학습을 하게 했다. 텔레비전 과외 공부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누구나 평등하게 공식적으로 인정한 과외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사로운 과외 공부를 위한 지출이 과연 줄었나. 경쟁은 공평한 준비 기회를 좋아하지 않는다. 고액 과외 수업이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 이제 사사로운 과외 수업을 포함한 사교육비는, 최근 한국교육개발원이 추산한 것을 보면, 한 해에 29조원이나 된다. 이 액수는 학교에 들어가는 교육비 25조원보다 많다. 교육 기회의 빈부 격차는 더욱 심해졌다.

영어가 공용어가 되고 영어가 판치는 세상이 오면, 부유한 집들은 기를 쓰고 자제들을 유학 보내거나 많은 돈 들여 좋은 교사를 붙일 것이며, 빈한한 집 자제들은 그러한 기회를 누리지 못하니, 교육 기회의 불평등이 심해지면 심해졌지 덜해질 턱이 없다. 필리핀에서 그러한 예를 볼 수 있다. 스페인이 통치하던 필리핀을 1898년 넘겨 받은 미국은 이 곳에 강력한 영어의 영향력을 심는다. 필리핀은 1948년 독립한 뒤 고유 언어인 타갈로그와 함께 영어를 공용어로 정해 두 개의 공용어가 있게 되었다. 영어 세력은 나날이 커졌다. 영어는 부유한 상류사회의 언어, 힘있는 사람들의 언어가 되었다.

필리핀 일반 서민의 언어생활에서는 재미있는 현상을 볼 수 있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되도록 고유 언어보다 영어 쓰기를 권하면서도 자신들은 영어에 서투르다. 그래서 서민 아이 들은 영어도 신통치 않고 고유 언어도 변변치 않다. 이런 환경에서 문법이 흐트러진 이상한 영어 표현이 생겨났다. 또, 영어 문장 안에 고유어 낱말을 자주 섞어 쓰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웃기는 이야기로 '갈 사람 가고 있을 사람 있어라'를 Go man go, is man is.라고 하는 것이 있다. 이것이 웃기는 이야기로만 남을 수 없는 때가 올지 모른다. 이 비슷한 한국식 영어가 정통 영어와 한국어 사이에서 트기처럼 생겨날 것이다. 한국식 피진 잉글리시가 될 이것은 한국 안에서만 쓸 수 있는 영어지, 세계의 영어는 아니다. 모든 한국인이 영어를 배우고 말한다 해도 이런 한국식 영어로는 바로 세계와 소통할 수 없다. 역시 정통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영어 공용어 시대가 되더라도 한정된 숫자에 그칠 수밖에 없다.

필리핀의 예에서 보듯, 영어가 한국어와 함께 공용어가 되면, 필시 한국어를 시들게 할 것이다. 영어를 하는 것이 자랑스럽고 한국어를 하는 것이 부끄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하철 객차 안에서 자랑스럽게 영어로 수다 떠는 꼴사나운 무리들이 틀림없이 나올 것이다. 거리의 간판은 이태원처럼 될 것이고 그것을 읽지 못하는 새로운 문맹들이 "겨우 한글 깨쳤더니 이제 양글자라니..."하고 세상을 원망할 것이다.

영어는 이 시대 언어 불평등의 원흉이다. 지식이나 교양이 우리보다 못한 이라도 영어 상용국에서 태어났다는 것 하나로 우쭐대는 것을 볼 수 있다. 교육 배경이 신통찮은 서양 젊은이가 관광비자로 배낭 메고 들어와서는 영어 가르친다고 눌러 앉아 뻐기는 나라가 한국 말고 또 있는가. 한국인이라고 해서 다 한국어 교사가 될 수 없듯이 영어 사용국 국민이라고 해서 다 영어를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아닌데도 말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날개가 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족쇄가 되는 언어 불평등은 인권에 직결되는 큰 문제다.

국가의 자주성과 민족의 자존심이 관련되는 상황에서는 반드시 통역을 요구하는 것이 관례다. 유럽 국가의 국가 수반이나 외교관 치고 영어 모르는 이는 없지만, 그들이 국제적인 공식석상에서 국가를 대표할 때는 자국어를 내세우고 있다. 유럽연합이 10개가 넘는 언어를 공용어로 삼고 있는 것은 각국이 언어 자주성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1999년 9월 핀란 드의 작은 휴양지 마을에 유럽 연합의 외무장관들이 비공식적으로 모였다. 이때 피셔 독일 외무장관이 회의장에 독일어 통역시설이 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두 차례의 회의에 참석을 거부하여 분란을 일으켰다. 피셔는 영어가 유창했다. 비공식적인 회의일 때는 실무언어인 영 어와 불어 그리고 주최국 언어를 쓰게 돼 있다. 스페인의 마투테스 외무장관은 만일 영어나 불어가 아닌 다른 언어(즉 독일어)를 쓰게 된다면 자신도 스페인 통역을 고집하겠다고 맞받았다. 이탈리아의 디니 외무장관이 어느 나라도 규칙을 어겨서는 안된다고 편들었다. 이 사건에서 유럽 연합의 언어 문제가 간단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나라가 작고 언어의 세력이 보잘 것 없더라도 자국어를 잘 지키고 높은 문화 수준을 누리는 나라들이 있다. 남 못지 않은 문화 전통을 지니고서도 한국 사람들은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것을 심히 부끄럽게 여긴다. 한국 사람이 영어에 서투른 것은 당연하다. 영어는 한국말과는 언어 계통이 너무 다르다. 생각하는 방식이 영미인과 우리가 같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영어는 무척 어렵다. 이 어려운 영어에 익숙해지기 위하여 전국민이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쓰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은 얼른 듣기에 그럴싸하지만, 염병에 익숙해지려면 모든 국민이 일상적으로 염병을 앓아야 한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대학을 나와도 길거리에서 외국인이 길 물을 때 답변 하나 제대로 못한다고 비난하는 이가 많은데 꼭 그렇게만 몰아붙일 일도 아니다. 회화 위주가 아니라 독해 위주로 가르쳤으니 그럴 수밖에 없으나, 실제로 외국인을 직접 만나 정보를 얻는 경우보다는 글을 통해 정보를 얻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것을 생각하면, 이 방법의 장점도 크다. 오히려 일상 회화가 능란하면서도 교양과 지식을 드러내어야 하는 단계가 되면 아는 것이 없어 엉뚱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더 큰일이다.

온 국민에게 영어가 필요한 것도 아니니, 국민 모두가 영어 공부에 목을 달아야 할 이유는 없다. 모두가 통역이나 번역가가 될 필요가 없으며 모두를 영어 통달자로 만들 필요도 없다. 영어가 필요한 사람은 영어를 더 좀 많이 공부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덜 공부하면 된다. 서양인 손님들이 잘 가는 가게에서는 상인들이 영어를 잘한다. 영어 뿐인가. 서울 동대문시장에 가면 러시아어 간판 건 가게들을 볼 수 있다. 그 가게 사람들은 러시아 손님과 러시아말로 흥정한다. 누가 그런 간판을 달라고 권하지도 않았고 러시아말을 배우라고 권하지도 않았다. 돈 버는 데 필요하면 배우지 말라고 해도 배운다.

컴퓨터 관련 기술의 발전으로 세계는 이른바 정보사회로 치닫고 있다. 영어는 인터넷을 통해 더욱 위력을 보이고 있는 듯했으나, 인터넷이 미국 바깥의 여러 나라에 보급되면서 영어 아닌 언어의 웹사이트가 급속히 늘었다. 영어가 차지하는 비율은 날로 낮아져 간다. 영국의 언어학자 그래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95년 세계 웹사이트의 84.3%가 영어로 된 것이었으나 5년이 지난 지금(2000년)은 영어 사이트 비율이 62%로 줄었다. 이 비율은 해가 갈수록 낮아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또한, 번역 소프트웨어가 계속 다듬어지면서 이제는 웬만한 외국어 능력 소유자보다 낫다는 정도에 이르렀다. 한성대학교 한국어정보처리연구소 고창수 소장은 번역 시스템이 곧 언어 장벽을 걷어낼 것이기 때문에 영어를 공용어로 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힘을 쏟아야 할 쪽은 영어 공부보다는 각각의 전문분야일 것이다. 망친 외교 이야기들을 들어 보면, 실은 영어를 잘못해서가 아니라, 현안을 미리 충분히 연구하지 않아 선후와 본말을 헤아리지 못하거나, 담당자가 너무 자주 교체되거나 해서 그렇게 된 경우가 많다. 외교관이 어찌 영어를 모르랴. 그 위에 외교 기술과 열성이 얹어져야만 할 것이다. 해당 분야의 깊은 부분을 알지 못하면 영어를 잘하더라도 소용이 없다. 가령 경제 관련 협상을 한다면, 영어도 영어지만 자국과 상대국의 경제에 관한 깊은 지식이 있어야 한다.

지금은 영어가 세상을 뒤덮고 있는 듯하지만, 한 언어가 지배적 언어의 자리를 누리는 기간은 인류 역사를 보면 그리 길지 않다. 당나라가 융성할 때에는 당나라는 영원히 망하지 않을 듯했다. 로마가 흥왕할 때에는 로마가 망할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쿠빌라이 칸 때의 몽골은 참으로 강성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지구를 반분하다시피하던 것이 불과 사백년 전이다. 오늘날은 미국이 초강대국이 되어 영어가 위세를 떨치고 있기는 하나, 이런 형편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다. 장구해야 할 민족의 장래를 시세 따라 한 언어에 걸 수는 없다.

국민 또는 민족이 위기에 처할 때 고향처럼 위안이 되는 것은 모국어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이승만이 미국에서 띄운 한국말 단파방송은 일제 치하의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 국내 사람들에게 힘을 주었다. 프랑스 망명정부의 자유프랑스 방송도 나치 치하의 프랑스인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독일의 운명이 나폴레옹 군대의 침공으로 바람 앞의 등불처럼 깜박거릴 때 베를린 대학의 피히테 교수는 그 유명한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연설로 독일인의 애국심을 고취했다. 그 연설에서 피히테는 독일인을 '모국어를 지킨 사람들'로 특징지어, 게르만어를 버린 프랑스인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모국어 이야기라면 프랑스 소설가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알퐁스 도데의 나라인 프랑스도 언어 정책은 철저한 단일화였다. 표준 불어 아닌 말들을 쓰지 못하도록 금지했으므로, 켈트어의 한 가닥인 브르타뉴말은 1951년까지 학교에서 수업시간은 물론이고 수업시간 아닌 때도 쓸 수 없었다. 초등학교의 학급에서는 '개패'를 만들어 브르타뉴말을 쓰는 학생의 목에 걸게 했다. 이 학생은 브르타뉴말을 입 밖에 내는 다른 학생을 적발해야 개패를 넘겨 줄 수 있었다. 그 날 마지막으로 개패를 차게 된 학생은 벌을 받았다. 공공 장소에는 '땅에 침을 뱉거나 브르타뉴말 하는 것을 금함'이라는 경고판이 붙어 있었다. 이런 교육과 분위기 조성으로 브르타뉴말은 사멸 직전까지 갔으나, 1980년대 사회당 미테랑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부활시키려는 노력이 브르타뉴의 학교들에서 진행되고 있다.

고유 언어의 보존은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복거일 씨의 주장은 영어를 공용어로 쓰자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영어를 우리 시대에 공용어로 정해 쓰는 것은 다음 태어날 세대들이 영어를 모국어로 선택할 수 있게 해 주기 위한 것이다. 결국은 영어를 우월한 언어로 하고 한국어를 열등한 언어로 받아들여야 하는 멍에를 후대에 씌우는 것이다. 한국어는 어떤 언어 못지 않게 모진 핍박을 받으면서도 굳세게 살아남았다. 사용인구가 6천만 명이 넘는 큰 언어는 지구상에 얼마 되지 않는다. 한국어를 자랑스러운 한국어로 계속 남게 노력하는 것이 이 시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다.

영어를 공용어로 삼는 것은, 비용은 비용대로 엄청나게 들이면서, 잘 가꿔야 할 한국어를 망가뜨리고, 영어를 통한 국제화라는 소득조차 별무한 결과가 될 것이 뻔하다. 국토 분단으로 우리 민족이 어려움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 사회에 언어 불일치의 장애가 없다는 것은 커다란 축복이다. 이제 영어를 끌어들여 언어 문제를 일으킬 필요는 없다. 이웃나라 일본이 어쩐다고 해서 덩달아 우리도 나설 것이 아니다. 그들의 언어와 문자가 지닌 한계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는 우리보다 훨씬 심각하다. 그 나라에서 전에는 문자를 로마 글자로 바꾸자는 사람들이 나오더니, 이제는 아예 영어를 안방으로 모시자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한때 아시아에서 벗어나 유럽의 일원처럼 되고 싶어하던 그들에게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
박 강문 (대한매일 데이터베이스팀장)
국립국어연구원 '새국어생활' 2000.봄
------------------------------------
http://columnist.org 서울칼럼니스트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