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이야기는 물론 지어낸 것이다.내가 알기로는 박순백씨(한글과컴퓨터
이사)가 이 이야기 창작자다.전에 박순백씨는 대학에서 근무했는데
데이콤
의 H-MAIL 서비스 시절에 해박한 지식과 재치있는 글솜씨로 인기가 높았다.
데이콤의 전횡적 처사에 대한 불만으로 순수민간 전자게시판인 엠팔이
창설될 때 이를 주도한 이도 그였다.9년전인 그즈음 그가 위 이야기를
게시판에 올린 것이다.
9년 전의 이 이야기가 잊히지 않는 것은,공감하는 바가 컸기 때문이다.
미루다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만다는 교훈을 주려고 박순백 교수는
썼지만,내겐 그보다도 이 이야기는 당시 컴퓨터에 대한 갈망,컴퓨터
값에
대한 절망과 함께 회상된다. 8088 칩의 XT PC에 10메가바이트의 하드디스크가
붙는 정도라도 몇달치 봉급이 들어가야 하는 값인데다 프린터는 또 왜 그리
비쌌는지.
최근에 고등학생이 컴퓨터가 없어 동료들의 대화에 낄 수 없자
자살했다
는 보도를 읽고,나는 어느 정도 그를 동정할 수 있었다.전과 비교할
수 없이
컴퓨터 값은 많이 떨어졌다.그래도 아직은 비싸고 그 때문에 절망할 사람도
있다.빈부 차이가 정보접근 기회의 차이에까지 이어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최근의 어떤 조사에서는 절반 가까운 학생들이 컴퓨터 때문에 스트레스를
느낀다고 응답했다.그 스트레스가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다.컴퓨터를 남들이
나보다 더 잘 알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컴퓨터를 들여다 보고 싶은데 공부에
지장 있다고 부모가 막기 때문에 오는 갈등,컴퓨터 중독증에서 빨리
벗어나야겠다는 초조감 등이 있겠다.그리고 최신 최고급 컴퓨터를
가지고
싶어하는 조바심도 그 한가지일 수 있다.
컴퓨터로 인한 스트레스 또는 컴플렉스는 학생 뿐만 아니라
성인들
사이에서도 많다.80년대 중반,미국에서는 컴퓨터를 모르는 회사간부들이
직장에서 떨려날까봐 전전긍긍했다.우리나라에서는 그 정도는 아니라도
컴퓨터에 어두운 간부는 골동품쯤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있다.
컴퓨터와 관련된 모든 두려움이나 조바심은 `한발짝만' 물러선다면
훨씬
적어질 수 있을 것이다.컴퓨터에 대해서는 이 방면 전문가가 아니라면 자신의
업무 수행을 위해 알아야 하는 부분만 알면 되는 것이고 그밖에는 선택
이다.자동차 운전만 할 줄 알면 됐지,구태어 구조나 원리까지 알 필요는
없
다.남이 10톤 트럭 몬다고 다 따라 할 필요는 없다.
펜티엄 컴퓨터가 나왔을 때 486DX 컴퓨터의 값이 팍 떨어졌다.사실
펜티
엄이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486DX가 못할 일은 거의 없다.이때 486DX를
사
서 쓰면 경제적이다.언제나 한발짝만 느긋하게 처져 가면 돈 덜 들이고
컴
퓨터를 즐길 수 있다.평범한 사용자라면 돈 들여 구태여 선두에 서려고
할
필요가 없다.펜티엄 200MHz가 나올 때 펜티엄 90MHz 짜리를 사면 즐길 것은
어지간히 다 즐길 수 있다.속도가 빠르면 게임하는 데 좋기는 하지만.
당장 인터넷을 알 필요가 없으면 나중으로 미루거나 대충만
알아두면 된
다.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모른다는 것이 자랑이 될 수 없으며,모르
면 모른 만큼 누릴 것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개인 차원이 아니고 회사 차원에서 컴퓨터를 매개로 한 경쟁을 해야
한다
면 사정이 달라진다.인터넷 월드와이드웹에 무시로 들락거려야 할 부서에서
486도 아닌 386SX 컴퓨터로 뭘 해 보겠다면 이보다 웃기는 희극도
드물 것
이다.
처음에 소개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가난한(또는 검박한) 교수가
컴퓨터
를 가지겠다는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는 것은 80년대 한국의
상
황에서나 나올 수 있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요즘 좋은 대학들은
교수들
에게 좋은 컴퓨터를 지급한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달라져야 할지 모르겠다.<교수는
필요한 컴퓨터의
구입을 대학 당국에 요청했다.총장은 컴퓨터가 왜 필요한지를 몰라서
구입
을 재검토하라는 말만 거듭했다.컴퓨터 기다리다 연구는 진전되지
않고 교
수는 노쇠해 갔다.대학은 발전하지 못해 폐교 직전에 놓였다.교수는
한이
맺혀 조교에게 유언했다."컴퓨터 구입요청서를 내 무덤에 묻어주게" >
여기서 `교수' `대학' 등은 딴말로 바꿀 수도 있겠다.
박강문 <서울신문 과학정보부장>
뉴스피플 1996.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