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서양식 따르기
 
                 오늘날 이른바 국제 기준이란 것들은 모두 서양 기준이다. 근대
               문명의 공로자가 서양 사람들이기 때문인데, 이 서양 기준이 서양 
               사람들에게는 합리적일지는 몰라도 동양 사람들에게는 그러하지 
               못한 것이 많다. 그리고, 더 들여다보면 서양 사람들에게마저 불편
               한 것도 있다. 또 구태어 따르지 않아도 될 것을 무작정 우리가 따
               르는 것도 있다.


                      <성과 이름>
 
                 동양에서는 성을 먼저 쓰고 이름을 나중에 쓰는데, 서양은 반대
               다. 성을 끝에다 쓰는 것이 그 사람들에게도 항상 편리하냐 하면 
               그렇지도 않은 듯하다. 그들도 전화번호부를 만들 때는 성을 먼저 
               쓴다. 명단을 작성할 때 성을 먼저 쓰는 경우도 많다.그들 자신이 
               불합리한 방식이라는 알고 있다는 증거다.서양이라도 헝가리 사람
               들은 본디 근본이 동양이라 성을 먼저 쓰는 것이 우리와 같다.

 
                 비행기표에는 로마자로 성명이 찍히는데 항상 내 이름은 끝에 N
               자가 마저 들어가지 못해 '강문'이 아니라 '강무'가 된다. 비행기 
               탈 때마다 내 이름을 잃는다.제주도 갈 때도 그렇다.서양  사람은 
               대개 이름이 성보다 짧지만, 우리는 그 반대다. 그들 기준으로 만
               들어 놓은 칸수에 우리 이름을 쓰자면 넘치게 마련이다.  짤린 내 
               이름을 볼 때마다 침대 길이에 맞춰 손님의 다리를 자르거나 잡아
               늘였다는 전설 속 서양인 선조의 무지막지함이 생각난다. 

    
                      <주소>


                 서양인의 관습 가운데서 비합리적인 것으로서 대표적인 것이 주
               소 쓰는 방식이다. 우리는 큰 데서 작은 데로 좁혀 나간다.서양인
               은 제 이름 먼저 쓰고 저 가까운 곳에서부터 차차 넓혀 나간다.동
               양인은 먼저 전체를 생각한 뒤 나를 생각하고,서양인은 나를 중심
               으로 세계를 이해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실용성을 
               보면 동양식이 우월하다. 우체부가 편지를 배달할 때 어느 방식이 
               편리할까 생각해 보면 안다. 정보 분류는 대분류 다음에 소분류가
               와야 마땅하다.헝가리 사람들은 우리처럼 주소를 쓴다. 우리와 통
               하는 구석이 많은 사람들이다.


                 국제 방식을 따른다고 언제부턴가 우리 규격 봉투와 우편 엽서
               에서 성명을 주소보다 앞세워 쓰게 하고 우편번호는 맨뒤에 적게 
               하는데, 잘한 일인 것 같지는 않다. 

   
                      <숫자 세자리씩 끊기> 


                  1만을 10천, 50만을 500천이라고 쓰니 우스운 일이다. 
 
                  국민학교(초등학교) 다닐 때는 52,6853,1274처럼 네자리마다 
                점을 찍었다.중학교에 들어가니 세자리씩 끊어  5,268,531,274
                로 해야 한다고 했다. 국제적으로 그렇게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
                라는 것이었다.우리 숫자 읽기는 분명히 네자리씩 끊어야 제대로
                읽힌다. 일본이나 중국도 마찬가지다.갑자기 세자리로 바꾸니 
                혼란스러워 새 방식 읽는 연습을 많이 해야 했다.요즘도 숫자를 
                읽으려면 잔뜩 긴장해야 한다. 참 불편한 서양식 기준이다.

 
                  네자리마다 표지가 돼 있는 주판을 수업시간에 내놓았다가 선
                생님이 세자리 표지가 있는 것으로 바꾸라 하여 새것을 사서 썼
                던 것이 기억난다. 주판에 네자리마다 표지가 있었던 것을 보면
                그전에는 은행 같은 데서도 모두 네자리마다 끊었던 같다. 

   
                       <관사(冠詞) 붙이기>


                  미국 도서관의 분류카드를 보면,Weekly News of the World(The)
                처럼 도서나 신문, 잡지 이름의 첫머리에 붙은 관사(the,a,an)를 
                맨뒤로 옮겨 괄호 속에 넣고 있다. 관사는 도서 분류 때 걸리적
                거린다. 프랑스(le,la,les,un,une)나 독일(der,die,das,ein,eine...)
                도 똑같은 불편을 겪는다. 


                  영어를 배울 때 신문, 잡지의 이름에는 정관사를 붙인다고 익
                혔겠지만, 실은 Neesweek, TIME, Financial Times처럼 그렇지 
                않은 경우도 아주 많다. 이름붙이기에서 관사는 군더더기로 간주
                되는 경향이 있다. 또 세상에는 관사가 없는 언어가 더 많다. 
                그런데 우리 신문들은 제호를 로마자로 적을 때 하나같이 영어 
                정관사를 붙인다. 맹목적 영어사대주의가 아닌지 모르겠다.


                  내가 프랑스 특파원으로 있을 때 내 명함을 들여다본 프랑스인
                이 물었다. 
 
                  "영어신문입니까?"
                  "아닙니다. 한국어신문입니다"
                  "왜 the를 붙입니까?"


                  생각해 보니 붙일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로마자로 빌려 제호
                를 적으면 될 일이고 영어 정관사를 붙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로마자로 적어도 제호는 우리말이다. 관사가 있는 언어를 쓰는 
                사람들도 군더더기로 여기는 것을 굳이 왜 쓰나?

박강문 <서울신문 과학정보부장>
서울신문사 발행 시사주간지 뉴스피플(1997.7.3) '정보화사회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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