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생활의 가면
우리 문자생활은 참으로 복잡하다. 체계가 다른 문자를 서너가지나
섞어 쓰는 국민은 이 지구상에 우리밖에 없을 것이다. 어지간히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다.
<...이번 행사에는 KEDO측에서 張瑄燮(장선섭) 경수로기획단장,
폴 클리블레드 미국 경수로대사 등 한미일 3국 정부대표단 25명을
비롯해 2백여명이 참석한다...>
<우리나라 국회의원의 4분의1에 해당하는 73명과 20개 대기업 총수 가운데 8명이 군(軍)에 가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고 MBC-TV
'시사매거진 2580'이 17일 보도했다>
위 신문기사에 쓰인 문자는 한글,한자,로마자,아라비아숫자의
네가지다. 이렇게 체계가 다른 문자를 어울어 쓰자면, 한글타자기
가지고는 도저히 찍어낼 수 없다. 지난날 한글타자기가 잘 보급되지
않은 큰 이유가 이것이다.
우리는 문자 뿐만 아니라 외래어 사용에서도 매우 너그러운
사해동포주의자가 된다. 우리말로 옮기려 하기보다는 원어 그대로
가져오는 경향이 점점 심해진다.
가령 '컴퓨터'라는 말을 그대로 쓰는 국민은 영어사용국민을 빼놓고
우리하고 일본 밖에는 없다. 프랑스인은 컴퓨터를 '오르디나퇴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질서, 정돈, 명령 등의 의미가 들어있다. 소프트웨어는
'로지시엘'이라고 하며 논리라는 뜻이 포함돼 있다. 중국인은 더 멋진
말로 옮겼다. 컴퓨터는 '電腦', 소프트웨어는 '軟件'이라고 한다.
하드웨어는 '硬件'이다. 우리나라 일부 사람들이 컴퓨터를 '셈틀',
소프트웨어를 '무른모', 하드웨어를 '굳은모'로 쓰기를 주장하지만,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영화 제목은 이제 완전히 번역하지 않기로 한 듯하다. '인디펜던스 데이', '에어포스 원','데이라잇', '너티 프로세서', '랜섬', '바운드', '나이스가이',
'섀도우 프로그램', '어페어 플레이'...
이렇게 된 것은 국제화, 세계화 바람 때문인 듯도 하고, 영화직배로
말미암아 일본을 거치지 않고 직접 들어오는 것이 많아서인 듯도 하다.
일본을 한번 거쳐 들어올 때는 영화 제목에 일본 물이 묻는 경우가 많기는
해도 대개 번역돼 들어 왔다. '상(上)과 하(下)', '남과 여', '血과 砂'따위는
우리말이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이다. 배우 이름도 '아란 랏드', '아랑 드롱',
'안소니 퀸'처럼 이상하게 표기됐다. 일본이 번역해 주지 않아 그저 손쉽게
원어 제목을 그대로 쓴다면 한심한 일이다.
광복 50여년이 지나도록, 서양 소설 제목을 일본인이 붙인 대로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는 것들도 많다. '椿姬', '白鯨', '레 미제라블',
'골짜기의 백합'은 각각 '동백부인', '모비 딕', '가련한 사람들',
'은방울꽃'으로 고쳐야 마땅하다. 지금은 고쳐졌겠지만, 국정교과서에
'視學官' '警視廳' 따위의 말이 그대로 나오던 때도 있었다.
이제는 일상생활에서도 '입장'(立場)이란 말이 너무도 흔히 쓰여
일본말인 줄 모른다. 전향적'(前向的)이라는 이상한 말도 거리낌없이
쓴다. '...에 다름 아니다'라는 말을 쓰는 학자를 만나면, 그 학자의 학문
깊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일본말에서 완전히 해방되기도 전에 국어는 영어의 큰 물결에 잠겨 간다.이제 서울의 거리는 자꾸 영어 간판이 늘어나 모두 이태원 거리 비슷하게 돼 간다.일상 쓰는 말에 영어를 섞어 쓰는 이들도 많다. 우리말 어휘와 구조도
영어 영향을 받아 변해 간다. '더 이상'이란 말은 분명히 영어의 영향을 받아
새로 생긴 것이다. 영어의 현재 진행형을 흉내내 '...고 있다'를 너무 자주 쓴다.아기는 '우유'를 마시고 신사숙녀는 '밀크'를 마신다. 사전에는 '포도주'가
있지만 술집에 가서는 '와인'을 달라고 해야 맛볼 수 있다.
연예 기사를 보면 '서구적인 마스크'라는 말이 찬사로 쓰인다.용모까지도
서양 사람 비슷하면 환영받는 것이다. 도대체,영어를 30년 넘게 공부해
왔지만 '가면'이란 말인 '마스크'가 왜 '용모'나 '얼굴'이란 뜻으로 쓰이는지
까닭을 알 수 없다. 하기는 우리 모두 한꺼풀 외제 가면을 덧쓰고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말의 가면, 얼굴의 가면, 자꾸만 가면을 쓰면 가면과
진짜 얼굴을 구별하기 힘들어질 것만 같다.
박강문 <서울신문 과학정보부장>
서울신문사 발행 시사주간지 뉴스피플(1997.8.28) '정보화사회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