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미디어의 환상
요즘 컴퓨터 판매 광고를 보면 모두 멀티미디어 컴퓨터 아닌
것이 없다. `컴퓨터를 사기만 하면,시대의 총아인 멀티미디어의
혜택을 입게 되리라' 하는 말씀들이다.
컴퓨터 장수들 주문(呪文)도 자주 바뀌더니만, 이제 가장 효험
있는 주문은 `멀티미디어'란 것으로 대충 낙착된 듯하다.빛 바랜
여러 주문 가운데서 `사무 자동화'는 그래도 실사구시의 실팍함
을 풍겼는데,`멀티미디어'는 곡마단의 색색 깃발처럼 들뜨게 하
는 느낌이 있다.
며칠 전 컴퓨터를 한 대 샀다.물론 멀티미디어다.요즘 새로 나
온 컴퓨터,멀티미디어 내걸지 않은 것 없으니까 당연하다.이 컴
퓨터로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듣고,영상 반주도 즐기고, 게임도
한다.인터넷 월드와이드웹도 누비고,외국어 학습 시디롬도 틀어
본다.전에 쓰던 기계에 없던 다양한 기능들을 찾아 이것저것 해
보면서 나 혼자 뇌까린 말이 "멀티미디어라는 게 `팔방미인'이라
는 거구나"였다.
여러 가지 기능이 추가된 새 컴퓨터를 가지고 내가 한 일이란
대부분 일이 아니라 오락이었다.이 컴퓨터는 오락기구 치고는 값
비싸지만,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하는 재미있는 물건이다.며칠 동
안 컴퓨터가 제공하는 환락에 푹 빠졌다가 느끼게 된 것은,컴퓨
터가 이젠 곁갈래로 너무 빠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컴퓨터'라는 말 자체가 계산기이듯이,개발 초기의 목적은 어
려운 셈을 빠르고 정확하게 하자는 것이었다.80년대 초반까지도
컴퓨터로 하는 일은 대개 계산이었다.컴퓨터 하는 이가 꼭 배워
야 할 것으로 돼 있던 코볼이나 포트란이라는 컴퓨터 언어도 계
산을 위한 것이었다.이때는 프로그램을 대개 사용자가 손수 만들
고,프로그램이나 데이터 입력은 카드들에 구멍을 뚫어서 했다.이
러니 컴퓨터는 보통 사람이 감히 다룰 물건이 아니었다.
그 뒤 대형이나 중형 컴퓨터에 연결하는 멍청구리 단말기가 등
장하면서 문장 처리에 라인 에디터를 자주 쓰게 되었는데 워드프
로세서의 초기 단계다.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되자 사람들은 글쓰
기에 컴퓨터가 얼마나 유용한가를 실감하게 되고 편리한 워드프
로세서 프로그램들이 속속 나와 환영을 받는다.
컴퓨터의 또 다른 중요한 용도를 발견하게 되니 바로 정보 저
장 및 검색이고 통신이다.셈하기,글쓰기,정보 검색,통신(문자) -
좀 편협한 생각일지는 몰라도 이 네가지가 컴퓨터의 본령이며,그
밖의 일은 잡기나 여기라고 할 수 있다.
요즘 컴퓨터는 잡기를 자꾸만 기웃거리다가 정체성의 혼란에
빠져 있는 꼴이다.컴퓨터는 재능꾼이긴 하지만 잡기 수준은 아무
래도 각부문의 전용기에 미치지 못한다.컴퓨터로 보는 비디오 시
디 영화는 전용 비디오 시디 플레이어(텔레비전 수상기와 연결)
로 보는 것만 못하다.음악도 전용 오디오기기의 웅장함이나 섬세
함을 갋을 수 없고,게임은 전용 게임기의 현란한 색채와 박진한
동작 처리를 따르지 못하며,영상 반주기능도 휴맥스나 아싸 같은
노래방 기기를 뛰어 넘지 못한다.
인터넷의 웹을 통해 텔레비전 방송을 실시간으로 시청할 수 있
다고 말들 하지만,반은 거짓말이다.찔끔찔끔 부분적으로 영상을
받아 저장했다가 재생하는 정도에 불과하다.정지된 그림조차도
받아 보려면 하품이 나올 지경인 것이 웹의 현실이다.대역이 좁
은 통신 회선의 문제를 해결하면 되는데,한참 세월을 기다려야
하고,그래 봐야 텔레비전을 능가하기도 어렵다.
또 웹을 통해 루브르나 대영박물관의 미술품을 감상한다 해도
해설 붙은 도록을 보는 것만 못하다.
원격 영상회의라는 것도 한번 하려면 기기 조작이 거추장스럽
고 얼굴 맞대는 것과는 분위기도 달라,설치만 해 놓고 쓰지 않는
곳이 많다.인터넷폰도 값이 싸다지만 불편하다.
아직 멀티미디어 컴퓨터는 환상이다. 앞으로 더 개선된다 하더
라도 컴퓨터가 팔방미인이 되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도 않다.제
조업자는 자꾸만 뭔가 새로운 것을 붙여 구매욕을 자극하고 소비
자들은 절실한 필요 없이 끌려갈 뿐이다.
멀티미디어에 홀릴 필요는 없다.비싼 컴퓨터를 사서 거실에 놓
고 영화나 볼 양이면,화면 넓은 텔레비전 사는 편이 훨씬 낫다.
박강문<서울신문 과학정보부장>
뉴스피플 1996.11.21
정보화 사회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