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화면의 도깨비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하고 같은 말로 인사하는 한 겨레 사람들이 모여서
'코리안  컴퓨터 처리 국제 학술회의'를 했다. 이 학술회의는 지난 8월 중국 연길에서
열렸다. 회의 이름을 남한 학자들이 `한글 컴퓨터 처리 국제 학술회의'라고 하자는 것
을,  북한 학자와 중국 `조선족' 학자들이 자기네들은 `조선글'이라 하니 받아들일 수
없다 하여, 중립적인 말로 `코리안'을 쓰기로 했다고 한다. 

  학자들의  국적이 세 가지라고는 해도 이 회의에 `국제'를 붙인 것 또한 자연스럽게
들리지는 않는다.어쩐지 정이 멀어지는 말 같다.격동의 세월을 겪으면서 몸 담은 나라
가 나뉘기는 했지만, 모국어를 함께 쓰는 동포가 만난 모임이다.
 
 '코리안  컴퓨터 처리 국제 학술회의'라는 명칭은 마음에 들지 않아도,이 모임 자체
는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좀더 진작, 그리고 자주 모였어야 했다. 떨어져 살고 있으니
까 함께 쓰던 말이 점점 달라져, 서로 얼른 이해하기 힘든 낱말도 있게 되었다.모여서
의논하는 것은 갈라지는 틈새를 좁히는 데에 유익하다.  
 
 연길 회의에 모인 학자들은 진지하게 여러 문제를 논의했다고, 거기 갔다 온 분에게
서  들었다.북한은 한글 자모 순서가 다르고, 컴퓨터 글자판도 다르며,코드도 다르다.
컴퓨터 용어도 같지 않은 것이 많다.자모 순서와 글자판에서 통일안이 나온 것은 다행
한 일이다.
 
 그런데, 남한 안에서도 컴퓨터 글자판과 코드 문제는 논란이 많고 아직도 통일된 단
계는 아니다.글자판은 일반적인 이용자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므로 나는 이 문제에 관심
이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컴퓨터 글자판은 한가지로 고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내 생각
이다.그리고  굳이 하나를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면, 두벌식보다는 세벌식으로 하는 것
이  좋다는 것이다. 연길회의에서는 두벌식으로 한다는 데 합의하고, 세벌식에서 대해
서는  논의하지  않았다고 한다.내 생각으로는 두가지나 세가지 표준 글자판을 두어도
무방하다고 생각된다.업무나 기호에 따라 개인이 글자판을 골라 쓰면 되는 것이다.

 나는 세벌식 글자판을 쓴다.워드프로세서 `아래아 한글'과 통신프로그램 `이야기'에
서는  세벌식 글자판을 쓸 수 있다.개인용 컴퓨터 운영체제인 `원도 95'에서도 세벌식
을 쓸 수 있다. 

 두벌식  글자판을  내가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는, 때때로 내가 원하는 글자를 찍을
수  없고(이 문제는 코드 방식하고도 관련이 있다), 또 때때로 컴퓨터 화면에 내가 요
구하지 않은 글자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두벌식  글자판으로 `서울신문'이라고 네 음절을 쳐보자.`서' 다음에 `울'의 `ㅇ'을
치면  `성'이라는  글자가 화면에 나온다. `ㅜ'를 치면 `성'의 `ㅇ'이 떨어져 나와 뒤
음절로 옮겨져 `서우'가 되고 이어 `ㄹ'을 치면 `서울'이 된다. 여기에 `신문'의 자모
를 차례로 쳐 넣으면 `서울'의 `울'자 받침이 일시적으로 `ㄹㅅ'이 된다. 원하지도 않
았는데  잠간  나타나는 이런 글자를, 두벌식 비판자들은 `도깨비 글자' 또는 `번갯불
글자'라고 부른다.
 
 두벌식은 자음(초성과 종성 구별없이) 한 벌, 모음 한 벌로 돼 있다. 세벌식은 초성
자음, 모음, 종성 자음(받침)이 한벌씩이다.한글은 모아쓰기라는 독특한 글자 구성 때
문에,  초성  자음과 종성 자음이 구별되도록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두벌식은 이것을
무시하기 때문에 `도깨비 글자'가 나타난다.

 표준 두벌식 글자판의 배열은 자모 사용 빈도수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는 지적도
받는다.  모음 중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ㅏ'를 검지가 아닌 중지로 치게 해 놓았다.
있다' `갔다'의 쌍시옷 방침도 꽤 많이 쓰이는 것인데, 윗글쇠를 눌러 치게 되어 있어
번거럽다.
 
 두벌식 글자판의 또 한가지 약점은 수동식 타자기와 공통으로 쓸 수 없다는 것이다.
전동 타자기로는 쓸 수 있지만, 컴퓨터의 도깨비보다 더욱 해괴한 `숨어 있는 유령'과
수도 없이 마주쳐야 한다.아버지'라고 세 글자를 쳐 보자.`ㅇ' `ㅏ' `ㅂ'을 칠 때까지
아무 것도 종이에 찍히지 않다가 `ㅓ'를 치면 비로소 `아'라고 찍힌다.아직 `ㅂ'은 숨
어 있는 유령이다.`ㅈ''을 치면 `아버'까지만 찍힌다. 마지막으로 `ㅣ'를 쳐도 `지'를
볼 수 없다.공백 글쇠까지 눌러야만 마침내 `아버지'가 완성된다.
 
 나는 두벌식  글자판이 남북한 통일글자판이 된다 할지라도 쓰고 싶지 않다.컴퓨터
화면에서 도깨비를 보거나 타자기에서 유령을 만나고 싶지 않으니까. 

  박강문 <서울신문 과학정보부장>
  서울신문사 발행 시사주간지 뉴스피플(1996.9.19) '정보화사회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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