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써 보지 않아서 모릅니다” 인터넷 전자우편(이메일)으로 원고
를 보내 달라고 했을 때 이렇게 말하는 분한테는 다음부터 되도록 원고를 청
탁하지 않는다.내가 세운 원칙이다.
사실 나는 원고를 청탁하기도 하지만 청탁받는 처지에 있기도 하다.일반
잡지,기업체 사보나 단체의 기관지들 같은 데서 원고를 청탁해 온다.그 매체
의 편집자들 가운데도 전자우편 이용을 요구하는 이가 점점 늘고 있다.
육필 원고를 “와서 받아 가시오” 하는 필자는 국보급 인사라면 모를까
이제 어디서나 사절이다.차들이 많아져 서울 시내에서 이동하는 일은 끔찍하
기도 하지만,옛날처럼 한가하게 원고를 받으러 다닐 만한 기자도 없다.
팩시밀리로 원고를 보낼 줄 아는 필자라면 아직은 잔명을 보존할 수 있다.
그러나 송고의 방편이 팩스가 전부인 줄 아는 필자의 설 땅은 점점 좁아진다
.팩스로 원고를 주고 받는 것은 전달의 수고와 시간을 줄여 주기는 하지만,
입력이라는 과정을 생략해 주지는 않는다.
인터넷 전자우편으로 원고를 보내 오면 새로 일일이 한 글자씩 입력해야
하는 수고가 덜어진다.시간과 인력이 많이 절약된다.
내가 세운 원칙은 편벽되고 몰인정한 것일 수 있다.철두철미 적용할 수 없
는 원칙이기도 하지만 대충 이 원칙을 지켜야 하는 방향으로 세상은 가고 있
다.
이 원칙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왜 필요한가.첫째는 앞에서 이미 말했 듯
일의 능률을 위해서다.둘째는 필자 능력 판단의 기준이 된다.셋째는 필자의
성실성을 재는 잣대다.
세상은 변하고 있다.그 변화에 적응하지 않으면 살아 남지 못한다.이 변화
에 대한 저항이 곧 지조 지키기가 될 수는 없다.추우면 옷을 두꺼이 입어야
산다.삼동에 홑옷을 고집하는 것은 지조가 아니라 우행이다.전차가 처음 서
울 시내에 다닐 때 어떤 이들은 체통을 지킨답시고 본체만체했다.이것은 지
조도 아무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존경받지도 못하고 자신만 불편할 따름이었
다.
세상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필자의 글이라면 읽을 만한 것이 없을 수밖
에 없다.그 필자의 글은 감각이 낡다.옛날 부르던 그 노래 마냥 다시 부른다
.사태를 예리하게 보는 눈이 없다.판단이 흐리멍덩하고 논리는 가지런하지
않다.전자우편 쓸 줄 모르는 분의 글이라고 해서 다 그러한 것은 물론 아니
지만 그러한 경우가 많다는 것은 사실이다.
요즘은 점쟁이를 잘하려 해도 컴퓨터를 써야 하는 세상이다.자신이 하는
일에 도움이 되는 이로운 기계가 있으면 그것을 쓰는 것이 마땅하다.그것을
외면하는 것은 무가치한 고집이다.그것을 쓸 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
이 무능하다고 공표하는 것이다.
문필가의 집필은 직업행위다.직업행위는 직업정신으로 수행된다.직업정신
은 성실성을 빼고 이야기될 수 없다.
글쓰는 이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자신이 쓴 것과 다르게 글이 지면에
나오는 것이다.틀린 글자,빠진 글자가 나오고 줄이 멋대로 바뀌는 것이다.
이것은 원고를 다시 입력하는 과정에서 흔히 생긴다.이 과정을 필자가 미리
줄여 주면 오류가 끼어들 여지가 없어진다.전자우편으로 보내면 걱정을 어지
간히 덜 수 있다.
생산품이 최종 소비자에게 흠없이 전달되도록 생산자가 노력해야 하는 것
은 당연하다.글쓰는 이한테도 마찬가지로 필요한 성실성이다.자신에게 교정
기회를 달라고 간청하는 필자들이 더러 있다.그렇게 해 드릴 형편이 되지는
못하지만 그 성실성은 본받을 만하다.
나 자신은 원고를 써 달라는 부탁을 받으면 전자우편으로 보내겠다고 먼저
말한다.그쪽에서 그렇게 받을 채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팩스로
원고를 보낼 때는 최소한 한 두 군데는 틀려서 나가겠구나 생각하는데 이 예
상은 틀림없이 맞는다.그 다음 그쪽에서 또 부탁이 오면 대개 사절한다.내가
쓴 것이 틀려서 나오면 아주 불쾌하다.또 다시 불쾌해지고 싶지 않은 것이
다.
전자우편 이용할 줄 모르는 필자,그리고 편집자도 자신이 모르는 새에 따
돌려지고 있다.
박강문 [서울신문 문화생활팀장 http://user.chollian.net/∼baggang]
뉴스피플 1998.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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