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것들 시키지 않고...
개발이 덜 된 어떤 지역의 추장이 바깥 세상을 구경하면서 본 자동차에 반해 한 대 수입했다.문제는 자기 사는 곳에 차가 다닐만한 도로가 없는 것이었다.그래서 하인들을 시켜 차를 떠메게하고 올라타고 다녔다.차는 무겁고 덩치가 커서,하인들의 고생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기동성이 가마보다 못하였다.이 이야기는주제 넘은 사치를 비웃느라고 누군가가 만들었다.그래도,그 추장의 진취성만은 가상한 것이다.그는 아마 그 뒤 도로를 만들게 했을 것이고 아랫사람에게 운전 기술을 배워 오도록 했을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컴퓨터 시대에 `컴맹'을 자처하며 마치 자신을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지사 쯤으로 여기고 있는 사람보다 진취성이라는 면에서는 이 추장이 훨씬 낫다고 할 수 있다.어느 직장의한 부서에 성능 좋은 새 컴퓨터가 들어온 지 몇 달이 되었는데도 딱 한 사람만 사용할 줄 알고 딴 부원들은 접근도 하지 않는다.그 유일한 사용자가 출근하지 않는 날은 컴퓨터가 공일이다.이이야기는 만든 것이 아니다. 영국의 어떤 대학은 35세가 넘은 외국인 학생을 받지 않는다.딴 것은 몰라도 외국어(영어)를 익히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다는것이 이유다. 나이가 들면 일반적으로 학습능력이 떨어지게 마련이지만 언어는 더욱 그렇다는 것이다.어릴 때야 머리가 말랑말랑해서 배우는 것이 쏙쏙 들어가기도 하지만,무엇보다도 이때의 왕성한 `호기심'이야말로 학습 성취의 가장 중요한 요소다.교육학의 학습이론에서 강조되는 `동기유발' 이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나이가 들면 슬픈 것은 이 호기심이 줄어든다는 것이다.아이들을 키워 본 사람은 알 것이다.어린아이가 얼마나 이것저것 귀찮게 물어대는지. 어른 들도 동기를 유발하면 하긴 하는데 공리적이다."득이 없다면 애써 할 필요 있나?"하는 것이다.컴퓨터를 잘한다고 해 봐야 봉급을 더 받는 것도 아니니 까 애써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국내에서 컴퓨터 통신이 처음 시작되던 때에 천리안의 전신인 H-MAIL에 열심히 글을 올리던 분이 있었다. 컴퓨터 통신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함께 모이는 자리에서 그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그토록 왕성한 활동에 경의를 나타내면서 물어 보았다."두벌식을 쓰십니까,세벌식 을 쓰십니까?" "그게 무슨 뜻인가요?" 처음 듣는 말이라는 표정으로 그가 내게 되물었다. "컴퓨터나 타자기로 글을 쓰자면 글자판의 자음글자 모음글자를 하나하나 누르지 않습니까? 글자판 배열 방식이 몇가지 있지요.보통은 두벌식을 쓰지만,저처럼 세벌식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설명을 더 이어 가려고 하자 그가 말을잘랐다."아,그거... 아랫사람이 다 쳐 주지요.언제 그걸 치고 앉아 있습니까?" 자신은 힘들여 만년필이나 볼펜으로 원고지 칸을 메우고 아랫사람에게 그것을 컴퓨터로 다시 치게 한다는 것인데,이 정도 되면 컴퓨터 화면의 딴 사람 글들을 볼 때도 손수 검색하지 않고 아랫사람에게 프린트해 달래서 읽어 볼 것이 뻔했다. 좋은 승용차는 문 열고 닫기가 귀찮아 비서더러 타라고 내 주고 자신은 털털거리는 자전거를 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컴퓨터 통신의 묘미란 스스로 컴퓨터 앞에 앉아서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는 데에 있는것이다. 그는 겉멋만 든 네티즌이라는 것을 자백한 셈이었다. 그와는 더 나눌 이야기가 없어서 가까운 관계로 발전하지 못하였다.그의 왕성하던 활동도 짧게 끝났다. 그의 모습을 떠올리자면,개화기 때 우리 임금인가 대감인가가 서양 외교관들이 정구를하고 있는 것을 보고 했다는 말이 생각난다. "아랫것들 시키면 될일을,그렇게 땀 뻘뻘 흘리며 힘 쓸 것 있소?" 귀찮은 일은 내가 아닌 아랫사람이나 남이 해야 한다고 하는 생각 또한 호기심 결여와 마찬가지로 컴퓨터를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인지도 모른다. 지금 어느 직장 한 부서의 컴퓨터가 한가로이 놀고 있다고 해도 이런 상황이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다.그것을 쓸 줄 모르면 답답하게 될 때가 머지않아 올 것이고 변화될 상황은 동기 유발정도가 아니라 실질적인 강제로 다가올 수 있다. 박강문 <서울신문 과학정보부장> 뉴스피플 1996.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