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버리기

대학 다닐 때 이동승 교수(독문학)의 강 의를 들었는데 이분이 이르기를 "읽은 책은 바로 팔아서 술 마셔라" 하였다.지식과 정 보는 머리 속에 넣어야지 책 속에 두어서는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므로 이미 읽은 책은 팔거나 버리라는 것이었다.쌓여가는 책의 처리에 골머리를 앓을 때마다 나는 이분의 말씀을 떠올린다.

이미 어린 시절에 책은 귀중한 것이라는 관념이 머리에 단단하게 박혀 있어서 이분 의 말씀은 실행하기 어려 웠지만 지금은 절반쯤 지키고 있는 셈이다. 읽은 책은 되도록 버리거나 남에게 준다.읽고 나서 머리 속에 남아 있지 않을 지식이나 정보라면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다.

그런데 기억력이라는 것이 점점 쇠미해져 전에 읽은 책을 다시 들여다 보아야 하는 경우가 늘어났다.그래서얼마 동안만은 두기로 했더니 금세 책이 또 쌓이고 책더미 속에서 정작 필요한 책을 찾기가 힘들게 되었다. 결 국 버리기와 간직하기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 서 지내고 있다.

역시,책은 읽은 뒤에 버리는 쪽이 낫다고 요즘 생각하고 있다.전에 읽은 책에서 몇줄 인용하려고 집의 서가를 밤새도록 뒤지는 것보다 다음날 아침 교보문고에 가서 그 책 을 다시 사는 것이 시간과 정력의 낭비를 줄이는 길이라는 것을 가끔 경험하기 때문 이다.또한 요즘은 기억력을 컴퓨터 도움으 로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다.책이름은 생 각나는데 저자이름이 가물가물하다든가,그 반대의 경우에,이 간단한 것을 확인하는 것 이 실은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영문서 적일 때는 컴퓨터로 하버드대학교의 홀리스 (하버드 온라인 라이브러리 서비스)를 연결 하여 가끔 해결했다.

미국에 잠시 있을 때 대학 학기말 시험이 끝나면 학생들이 헌 교과서를 줄서서 파는 것을 보았다.한국 유학생들은 대개 팔지 않 고 죄다 가지고 귀국한다.이 두가지 상반되 는 태도는 도서관과 컴퓨터 온라인 서비스 등의 지원 체제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다 시 필요할 때 도서관에 가면 그 책이 있고 마음대로 빌려다 볼 수 있다면,또 도서관에 가지 않고도 원하는 정보를 다시 볼 수 있 다면,헌 책을 간수할 필요가 없다.이동승 교수도 독일 유학 때 학생들이 헌 책을 팔 이 맥주 사 마시는 것을 많이 보았을 것 같 다.

이분이 당신 말씀대로 읽은 책을 팔아 치우 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한편 생각하면 학 자인 당신이 쌓이는 책더미에 넌더리가 나 서 이 말씀을 했는지도 모른다.버리기로 원 칙을 정해도 버리기가 망설여지는 책들도 많다.가령 저자가 성심껏 자필 서명해서 보 내주는 기증본은 어떻게 할 것인가.문화부 기자를 오래 했던 내게는 잘 알고 지내는 문인과 학자들이 `박강문 선생 혜존'이라고 써서 보내오는 책들이 적지 않다.이 책들이 헌책방에 흘러들어가 나뒹굴게 할 수는 없 는 일이다.

이 문제에는 박재삼 시인이 묘책을 가르 쳐 주었다.이분은 문단 동료와 선후배가 보 내준 많은 책을 받아서 읽어본 뒤에 바로 고향인 삼천포의 모교에 우편으로 부쳐주는 일을 일찍부터 해 왔다.이 일을 본받지는 못했다.박 시인만큼 인정도 없고 성실하지 도 못한 탓이다.책을 포장하고 우체국에 가 져가 부치는 일은 그분만한 정성이 없고서 는 되지 않는다.이분이 만년에 건강이 좋지 않아 당신의 인품처럼 따스한 작품을 거의 내놓지 못하게 돼 안타깝다.

갱지로 된 책장들은 오래되면 누렇다 못 해 갈색으로 변하고 부슬부슬 부스러져 먼 지를 일으킨다.갱지 책은 버리기 첫 순위 다.한지로 된 고서는 내구성이 세계 최고 다.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존된 왕조실록 같은 책은 일일이 초를 발라 바로 어제 만 든 것 같다.책에 습기가 차면 퀴퀴한 냄새 가 나고 벌레 먹기도 하고 썩기도 한다.어 릴 때 볕 좋은 가을날 어른들이 책을 마당 에 널어 말리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오늘 날 이렇듯 정성들여 보존해야 할 책들이 얼 마나 될까.

아파트 생활이라 책을 쌓아둘 공간도 없 고 젊은 시절의 책탐이 줄어서 많이 버리는 데도 책은 계속 쌓여 이사라도 할라치면 책 이 원수다.민간이든 정부든 서지정보 데이 터베이스를 잘 만들어 원할 때 바로 접근할 수 있게 한다면 책 버리기 고민도 덜 수 있 을 텐데 그때가 언제 올지 모르겠다.

난로를 놓고 책을 태우면 에너지를 절약 하고 자원을 재활용하는 방법이 되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을 캐나다의 김기수 교수에게 말했더니 자신이 바로 가끔 벽난로에다 책 들을 태운다고 하는 것이었다."진시황,히틀 러가 따로 없군"하고 웃었지만,서울의 아파 트에서는 책 태우기도 어렵다.

박강문 <서울신문 과학정보부장>
뉴스피플 '정보화사회 칼럼'(1997.4.24)


정보화 사회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