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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05월 27일목요일 09:21>[조우석]

이성 자유 질서 노래한 '코스모폴리탄'

정사섭 시인 정사섭(鄭四燮.1910∼1944).일제시대인 1930년대 한국인으로서 가장 많은 에스페란토 시 작업을 했던 시인, 동경제대(帝大) 이후 프랑스 파리대 유학시절의 경험을 기초로 1938년 ‘LA LIBERPOETO(자유 시집)’를 20대 시절에 간행, 뇌막염으로 세상을 떠난 뒤 지금까지 완벽한 ‘작가적 익명’으로 남아왔던 이 시인의 한국어 번역시집 최근 출간.

문제의 신간인 시집 ‘날개 없는 새’는 외양으로 봐 에스페란토 동호인들끼리 돌려보기위해 만든 기념 출판물로 보인다. 하지만 면밀하게 시집을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시의 완성도에 아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그의 시가 우리네 근현대 문학사에서 보기 드물게 ‘세계시민으로서의 보편적 지평’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정사섭 문학을 한국문학 지도의 중심에 편입시켜야 옳다’는 논점 아래 쓰인 이 글의 요점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날개없는 새’는 현대 문학이 시와 단편소설 장르에서 만개한 1930년대 한국문학 일반의 수준에 비교해 봐도 경쟁력이 있다. 그의 시세계는 소월 지용 영랑 백석 이상 기림 육사등과 또 다른 세계이다.

그렇다면 인공언어로 쓰였다는 사실과 상관없이 한국문학의 범주에서 논의되어야 하고, ‘한국인이 산출해낸 문학’의 카테고리 안에서 자리매김될때 정사섭은 물론 한국 문학의 온전한 성취를 비로소 파악할 수 있다.” “이 시의 문을 열려는 이여/낡은 세상규범을 모두 버려라/이성적인 사람이 이 집에 사느니//이 시의 산에 들려는 이여/이리같은 사회폭력을 모두 버려라/자유로운 사람이 이 숲 속에 사느니// 이 시의 계곡에 들려는 이여/노예사회 굴종을 모두 버려라/긍지높은 사람이 이 골짜기에 사느니//이 시의 숲으로 들려는 이여/사슬을 쥔 손에 횃불을 준비하여라/온 세계 폭군을 사냥하고 싶느니…”

원래 시는 끝나는 단어마다 -on,-a,-o로 압운을 맞춘 원시의 리듬을 빼고 번역으로 읽어도 격과 맛이 감지되는 서시 격의 ‘문(門)’의 일부다. ‘낡은 세상규범’ ‘사회폭력’으로부터 벗어나 금세기 초반 모더니티의 핵심이념인 ‘이성과 자유의 질서’가 그가 노래하는 신세계이다. ‘긍지 높은 사람’인 시의 화자(話者)는 책상물림의 파리한 이상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전통적으로 계몽의 상징이었던 ‘횃불’을 들고 사회악에 맞설 준비가 된 전투적인 세계시민이다.

본래 이 시집에는 서문에 시의 꼴을 빌린 장시 ‘서문’을 담았는데, 여기에서도 자신의 독자적인 시작(詩作)철학을 보여준다.‘리듬이 시의 의복’이라는 것, 따라서 ‘시는 리듬의 의상을 갖지 않은 산문에 비해 그 매력을 뽐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사섭은 협애한 형식주의자에 머물지 않는다. 기존 소네트(단시)의 그릇안에 얽매이지 않는 ‘시적인 자유’,즉 서사적 충동과 함께 ‘건강한 세계질서의 연대’를 주창하고 있다. 또 다른 시에서는 ‘자유를 잃었어도 자존심은 잃지 않으리’라고 다짐하면서 그것을 ‘눈물로 얻게 될 겸허한 자유’라고 의연하게 언급(‘독수리’)한다. 그는 당시의 지적 유행도 있었겠지만 그는 ‘당대의 코스모폴리탄’이라서 ‘같은 이념을 가진 사람은 형제자매/사랑이 흐르는 곳이 나의 조국’이라고 노래(‘세계인’)한다.

정사섭의 시세계는 한마디로 우리 시문학에서 보기드문 ‘탁월한 모더니즘’의 세계이다. 그가 이룩한 모더니즘은 지금 시점에 비춰 낡았다고 지적할 수도 있지만, 포스트모던한 요즘 세월에는 더욱 돋보이는 ‘빛나는 순정함’으로 읽힌다. 이런 ‘정사섭의 모더니즘’ 획득은 그가 모국어 대신 인공언어를 취한데서 비로소 가능했다는 점도 곰곰히 새겨봐야 할 대목이다. 즉 그의 시세계에서는 동년배의 시인들이 그토록 버거워했던 전통의 무거운 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날개없는 새’의 주인공 정사섭은 전북 익산 출생. 배재고 졸업 뒤 일본 히로시마고교 문과에 입학했고, 도쿄(東京)제대에서 불문학을 공부했다. 당대의 수재였음이 틀림없던 그는 1936년 프랑스 파리대에서 불문학을 공부했다. 유학 귀국뒤인 1940년 결혼을 해 1남1녀를 뒀다. 현재 유족으로는 장녀 정초뢰씨와 그의 손녀딸이 있다. 김우선 김여초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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